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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지리기행>14.병자년 국토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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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어느 한해인들 다사다난하지 않았으랴만 지난해처럼 혼잡했던 시절은 없었을 것이다.숱한 세월을 거치며 쌓여온 나라와 겨레와 국토의 질곡이 풀릴 기미를 보이면서 보여준 혼란이었기에 의미가없을 수는 없다.그렇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삶이 고달픈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항간에 떠도는 말마따나 어떤 망할위인들 때문에 우리가 이 곤욕을 치러야 된단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지금까지 어떤 정권도 민주(民主)를 내세우지 않은 이들이 없건만 도대체 민주란 무엇인가.국민이 주인이요,민심이 천심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국민이 하늘이란 뜻 아닌가.율곡이 그의 만언봉사(萬言奉事)에서 선 조에게 이른다음의 말 중 임금을 국민으로 바꾼다면 오늘의 세태에 도움이 안 될 것도 없으리라.
『하늘과 임금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부모(국민)가 그 자식(통치자)에게 분노함으로써 이것이 그 기색에 나타난다면 자식은 비록 허물이 없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공경하고어려워함을 더해서 부모의 뜻을 잘 받들어 부모가 기뻐하는 것을보고서야 안심하는 법인데 하물며 진실로 허물이 있는 자식이라면허물을 고백하고 슬프게 사죄하여 마음과 행실을 고쳐 공경하고 효도함으로써 반드시 부모가 기뻐하는 기색을 보아야 할 것이옵니다.』이것은 물론 당시 빈발하던 천 재지변,특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에 대한 임금의 마음가짐을 역설한 대목이지만,지금 나라 안의 모든 부모들이 분노해 그 기색이 범상함을 넘어섰으니 그것이 죄많은 전직 대통령들이건,역사 광정에 영일이 없다는 현직 대통령이건 국 민의 자식된 도리로서 어떻게 해서라도부모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주연 배우들인 국민의 뜻을 어기고는 그가 아무리 뛰어난 연출력을 가진 통치자라 하더라도 좋은 연극을 만들 수 없다.한 때는 국토가 좁다느니,자원이 없다느니 하면서 무대인 우리 국토에잘못되는 연극의 책임을 뒤집어 씌운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설혹 무대에 책임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이만큼 살게 만든 배우들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예가 되는 일일 뿐이다.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대가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국토가 우리보다 큰 나라 중에 우리보다 어려운 나라는 얼마나 많은가.풍부한 자원을 가지고도 그것을제대로 활용치 못하는 나라는 또 얼마나 많은가.지금까지의 잘못된 연극에 대한 책임은 부도덕하고 몰염치하며 게다가 무자격이기까지 했던 전임 연출자들이 당연히 져야 할 것이고,앞으로의 연극은 배우와 무대를 탓할 수 없게 된 지금 감독이 지면 될 일이다. 그 책임은 어디까지일까.한국전쟁을 제외한다면 우리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80년 광주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김병언이 그의 중편소설『성수도』에서 나타낸 다음의 표현은 당시의 한을 어느 정도는 대변하고 있다.80년 그날 광주의 그 현장에서 아들을 잃은 목수 임성구는『한달이 지난 후 아무도 없는 한밤에 아들의 무덤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이제 유명을 달리한 그와 아들 사이에는 한자루의 예리한 식도가 놓여 있었다.그는 무덤 속의 아들과 천지신명에게 엄숙히 맹세했 다.이 한목숨 바쳐아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노라고.철천지 원수가 설령 지옥으로 도망친다 한들 거기까지라도 쫓아가서 명줄을 끊어놓지 않고서는 결코 눈을 감지 않겠노라고.』이 무슨 호랑이 금수강산의 비극인가. 한민족 역사의 무대인 우리 국토는 과연 결함이 없는가.과거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산천이 임자 산(主山)에 대해 등을 지고(背逆)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나라가 나뉘고 역적이 끊이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었고,그리하여 인심 또한 합 해지지 않으므로 구한(九韓)이니 삼한(三韓)이니를 만들어 서로 전쟁을일삼았다는 한탄도 있었다.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을 침뜸으로 삼아흠이 있는 곳은 절을 지어 보육하고,지나친 곳은 불상으로 억제하며,달아나는 곳은 탑을 세워 멈추게 하고,배역의 땅은 당간으로 돌려 앉혔으니 그 장소가 무려 3,500이라(朝鮮寺刹史料 참조),이로써 국토는 그 모든 병이 고쳐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궁화 우리 강산 용맹한 호랑이 기상일세(槿域江山猛虎氣像)」라는 첨언이 적힌 맹호기상도(고려대 박물관소장)에 의하면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끝이요,혜산은 입속이요,중강진은 앞발이요,청진은 귀요,평양은 가슴이요,서울은 배요,백두대간은 등뼈요,지리.덕유는 넓적다리요,목포는 뒷발이요,부산은 척추끝이니 이 강산 3,000리 3,500 혈처를 치료받은 호랑이가 이제 무대로 무슨 손색이 있으랴.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그 혈처를 더럽혀 놓았다는 점일 것인데,이 또한 무대의 잘못일 까닭이 없지 않은가.더럽힌 것도 사람이요,치우지 못한 것도 우리들의 잘못이다.불교를 국가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고려 시대때 하던 얘기니 이를 오늘의 개념으로 바꾸어 본다면 아마도 불도에 정진하는 청정비구(淸淨比丘)의 마음처럼 국토를 닦으라는 말씀이겠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부목군현(府牧郡縣)의 수는 대략 330여 곳,그러니까 고을당 열군데 정도의 장소에 요즈음 말로 하자면 환경보전 모범지역을 설정해놓은 셈이다.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리를 바로잡는 일이었다.지금 우리는 역사를 바로잡자 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시간이 공간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듯이 역사는 지리를 떠나 존립이 되지 않는다.그러므로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지리를 바로잡는 일이 따라야 한다.우리가 흐트러놓은 땅의 이치를 우리가 바로잡지 않는 다면 누가 그 일을 할수 있겠는가.
오늘 나는 어머니인 호랑이 국토의 젖꼭지에 해당될 인천 연안부두에 서서 마치 그 호랑이의 새끼인양 바다를 바라본다.내 앞으로는 지금 신공항 공사가 한창인 영종도가 마치 거대한 대륙인것처럼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그 뒤로는 삼목도 가 있을 것이고 아래로는 용유도의 끄트머리가 보인다.이 세 섬은 이어져 21세기 우리 민족 웅비의 상징이 될 새로운 공항이 들어설 것이다.그 공항을 빌미로 어떤 부정과 비리가 벌어졌는지 지금의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그들은 반드시 어 머니인 호랑이 국토의 응징을 받게 될 것이므로 호랑이 새끼들은 그 품에서 뛰쳐나와 바로 그 공항을 출발점으로 해 대륙으로,세계로 뛰쳐나가리라.그러나 나같이 어머니의 품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머니 호랑이를 돌보며 그들이 꿈을 이 루고 돌아오는 날 청정비구와 같은 깨끗한 몸과 마음이 된 호랑이 어머니 우리 국토의 품속으로 그들을 맞아들이리라.
(전 서울대교수.풍수지리연구가)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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