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하 기자의 주주클럽] 엉터리 문장에 전문용어 남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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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주식·펀드 관련 서류에 도무지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대목이 너무 많다. 어떤 건 다 읽어봐도 아무 내용이 없는 것 같다.”

초보 투자자의 푸념이 아니다. 투자의 달인 중에 달인이라는 워런 버핏의 말이다. 그것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펴낸 공시 지침서 머리말에 떡하니 써놨다. 잔뜩 힘이 들어간 문장에 어려운 금융 용어를 줄줄 늘어놓는 월가의 행태를 꼬집은 얘기다.

꼭 10년 전에 나온 이 지침서의 제목은 ‘쉬운 영어 안내서(A Plain English Handbook)’다. 월가의 전문가들에게 영어의 기초를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내용도 뻔하다. 복문 대신 단문을 써라, 능동태가 수동태보다 이해하기 쉽다는 식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SEC가 왜 영어 강의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컨대 ‘이 펀드는 주로 펀드 운용역이 저평가됐다고 믿는 유가증권에 투자해 자본 이득을 추구하며, 증권 투자에 따른 배당소득을 이차적으로 추구한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침서의 권고를 우리말 어순에 맞게 풀어보면 이렇다. ‘이 펀드는 실제 가치보다 주가가 낮게 평가된 기업에 주로 투자한다. 주가 상승으로 이익을 내는 게 가장 큰 목표다. 배당금은 이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

버핏이 요즘 한국 펀드 운용사가 내는 투자설명서·운용보고서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미국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아예 말문이 막힐 것 같다. 한국투자자교육재단이 3500명을 조사했더니 펀드 가입 때 주는 투자설명서를 읽고 내용을 이해했다는 사람이 20%도 안 됐다. 석 달에 한 번 보내주는 운용보고서도 17%만 이해한다고 했다. 엉터리 문장에 금융 전문가나 알아들을 용어를 쏟아내는 보고서가 태반이니 당연한 결과다. 더 큰 문제는 외국어 남발이다. 심지어 조사만 빼고 죄다 영어를 쓰기도 한다. 시장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내놓고 일반 투자자는 알아듣지도 못할 ‘비교지수 대비 언더퍼폼했다’는 표현 하나로 슬쩍 넘어간 펀드도 있다.

국립국어원 정희창 학예연구관은 “누구든 무심코 글을 쓰다 보면 현학적으로 흐르기 쉽다”며 “독자가 누군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펀드 설명서·보고서의 주요 독자는 아이들 교육비 마련을 위해 반찬 값을 아끼는 주부나 내 집 마련을 꿈꾸며 허리띠를 졸라맨 직장인이다. 펀드매니저의 높은 연봉을 대주는 것도 결국 이 사람들이다. 참고로 버핏은 자기 회사 주주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때 항상 자신의 누이를 독자로 가정한다. 비전문가를 염두에 두니 자연히 쉬워질 수밖에 없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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