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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추방원년>1.'선거부패' 실상은 이렇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저는 이번 4월 총선에 나설지 안 나설지 모르는 다선 의원입니다. 선거를 3개월여 앞둔 병자년 벽두,제 머리 속에는 과거의 선거 운동 장면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갑니다.여러분에게 사죄컨대 그것은 정녕 부끄럽고 추악한 필름입니다.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지요.
선거요? 제가 경험한 선거란 대부분 저급한 돈의 잔치였습니다. 조기축구에서부터 자정 넘어 상가(喪家)까지 하얀색 현금봉투가 내 손을 떠나지 않았어요.저는 선거 때마다 20억원은 써야했습니다.어떤 대도시 동료의원들은 40억~50억원까지 썼다고 하니 나는 그래도 양반이었나요? 출마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뭔줄 아십니까.
관권(官權)의 줄을 엮는 거지요.경찰서.시청.구청을 찾아가는겁니다.「회사」라는 간판을 내건 안기부 분실도 빠뜨리면 안되고요.제가 직접 서장이나 시장을 만납니다.나도 한때 그들보다 훨씬 높은 직위에 있었지만 표앞에서 체면 따위는 온데간데 없어지는 거죠.
만나서 무얼하냐고요? 서로 헤픈 말을 건네고,헤픈 웃음을 짓다가 나는 가지고 간 돈가방을 두고 나옵니다.어떤 때는 수백만원,많게는 1,000만원을 넘길 때도 있었어요.물론 현금이지요.정보과형사,시청의 담당공무원,안기부직원들에게는 서장.시장.분실장이 알아서 나누어주는 겁니다.
그들 뿐인가요.동장이나 통.반장들은 그야말로 상전이에요.동장10여명을 갈빗집에 모아 융숭하게 대접하고는 두둑한 봉투를 돌려야 합니다.그러면 동장들이 그중에서 적당히 자기 것을 챙기고는 통.반장들에게 갈라주지요.
그렇게 먼저 울타리를 쳐놓고는 이제 표를 모으러 다닙니다.
크게 당 조직과 그밖의 모임들이 있어요.아침에 사무실로 나가면 조직별로 출동 스케줄을 알려줍니다.어느 어느 동에 협의회.
부녀회.청년회별로 점심.저녁 회식 모임을 만들어 놓았다는 거죠.어떤 자리는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기도 하지만모임주선자에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가 고깃집이죠.제가 도착하면 이미 상마다 갈비.불고기가 수북이 쌓여있어요.어떤 부인은 집에 싸가기도 하는데 한 동료의원은 『그럴 때면 때려주고 싶도록 밉다』고 하더군요.고기 값을내주고 또 50만~100만원이 든 봉투를 남기고 와야 합니다.
유세장 이야기는 더 창피합니다.상대 후보와 세(勢)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면 박수부대를 동원해야 합니다.그러면 한 사람에게 몇만원씩 계산해 주어야지요.몇백명이 왔다고는 하는데 정말 그 수가 맞는지 알 길이 있나요.
이래 저래 뭉칫돈이 들어가지만 선거 후에 보면 이런 저런 구실로 상당액은 중간에서 새버린 것 같아요.
어쨌든 표가 보인다 싶으면 가리지 않고 밥 사고 봉투를 주었습니다.상공회의소 회원들부터 야쿠르트.우유.보험 아줌마들까지….얼굴도 모르는 노인의 회갑잔치에 화환보내고 축사하고 봉투주고…. 선관위는 무얼 했느냐고요?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당시만해도 선관위가 무얼 단속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선거란 그저 그러려니,그렇게 한바탕 잔치소동을 치르고 끝나면다 흐지부지되는 것이려니 했던 거지요.
이쯤되면 여러분은 궁금할 겁니다.그 많은 돈이 어디서 생기느냐고요. 처음 선거에 뛰어든 사람들은 돈 걱정을 많이 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니 여당 후보는 저절로 돈이 생기더라고요.
재벌 그룹이 갖다주고 은행에서 봉투를 보내오고 청와대가 주고당에서 내려오고….적게는 50만원부터 많게는 수천만원까지 실탄지원은 다양합니다.
야당도 요즘은 사정이 많이 좋아진 것같더라고요.야당 후보 중에도 재력가가 상당하니까요.
***.이기고 보자'式 이젠 안돼 반대 급부요? 선거 때야 당장 걸린 게 없지만 당선돼 일이 생기면 신세를 갚아야 합니다.평소 상임위같은 데서 업체를 은근히 협박해 돈을 당기는 의원을 많이 봤어요.그런 의원중에는 야당이 더 많습니다.
얼마전에도 그런 「협박범」으로 야당의원 한사람이 구속되지 않았습니까.평소에 그렇게 모아놓았다가 선거때 쓰는 거지요.
털어놓고나니 저 자신에 대해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데요.하지만 저도 할 말은 있습니다.우리 정치판이 선진국처럼 페어플레이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잖아요.
여당은 어느 대선,어떤 총선이든 정권의 생명을 걸고 덤볐습니다.이겨놓고 보자는 거였죠.모자라는 정통성을 돈으로 메웠습니다.어리석은 유권자들도 맞장구를 쳤고요.
저는 개나리가 피는 오는 4월,후보나 유권자들이 과연 얼마나달라졌는지 한번 지켜볼 겁니다.
(이 고백록은 어느 의원의 구술을 받아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선거 부패는 여야 공히 관련되어 있으므로 형평을 기하기 위해의원의 여야 소속을 밝히지 않았다.) 정리=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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