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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정부가 양동이 대신 양수기를 선택해야 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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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안정 논란 이면의 누수 효과 대 흡인 효과 논란

1980년에 들어선 레이건 행정부가 한창 공급측 경제학(supply-side)을 설파할 때의 일이다.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가 정책의 핵심이었다. 경제 주체 가운데서도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이었다. 자연히 가진 자를 위한 정책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이런 비난에 대한 방어 논리가 바로 누수 효과(trickle-down effect)였다. 구멍이 뚫린 양동이에 물을 부으면 결국 물은 흘러내려 대지를 적신다는 논리였다. 기업이나 부자를 도우면 결국 모든 계층과 경제 전반에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주장이었다.

이 무렵 한 독자가 주간지 <타임> 독자투고란에 실었던 반론이,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독자는 누수 효과에 맞서 흡인 효과(ooze-up)를 언급했다. 서민들을 도우면 이들이 기업 물건을 많이 사 쓸 것이다. 이는 기업이나 부자 모두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러니 서민부터 직접 도우라는 주장이었다. 비록 학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논란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을 짚은 면이 있었다. 과연 대기업과 부자부터 도울 것인가? 아니면 서민부터 도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정답은 없다. 각 시대별로 그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케네디 대통령 시기에는 누수 효과가 비교적 강했다. 당시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대기업과 부자들에 우호적이라는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경제 전반에 대한 긍정적 파급 효과가 컸다. 케네디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비판에 맞서 반박했던 말 그대로였다. ‘밀물이 들면 모든 배는 떠오른다.’ 경제가 호전되면서 서민들 형편도 크게 나아졌다. 경제 정책이 특정 계층 편향적이 아니냐는 논란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레이건 시절의 경제 정책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미 공화당 지지자들이나 보수적 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이 시절이 90년대의 장기 호황을 낳은 밑거름이 됐다고 본다. 민주당 지지자들이나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이를 전면 부인한다. 반면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기의 대기업과 부자 편향적 정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누수 효과나 흡인 효과는 당시의 경제 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물을 흘려보내는 양동이에 구멍이 제대로 뚫려 있는지, 물을 빨아들이는 양수기는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을 둘러싼 논란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장이냐 안정이냐의 이면에는 누수 효과와 흡인 효과 가운데 어떤 것을 우세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대기업과 부자를 돕는 일이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다고 치자. 그렇다면 서민을 먼저 도와야 한다. 그것도 직접 도와야 한다.

우리의 경우는 현재 누수 효과가 극히 제한적이다. 몇 해 전부터 기업에서 가계로 소득이 이전하는 경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어서다. 쉽게 비유하자면, 기업에서 가계로 물이 흘러들어가질 않는다. 양동이 구멍이 막혔거나 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다. 구멍이 숭숭 뚫렸던 시절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강한 기업과 약한 가계라는 최근의 공식이 성립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을 아무리 도와야 개인의 소득이나 가계의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다.

반면 서민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면 이것은 바로 소비 증가로 이어진다. 가처분 소득의 증가야말로 소비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정설이다. 게다가 현재 서민들은 돈 벌어서 빚 원리금도 제대로 못 갚는 실정이다. 이들에게 소득을 이전해주는 즉시 기업의 수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현재 양수기는 물이 흘러들어 오는 족족 빨아들이는 상황이다.

정부는 최근 성장에서 안정 우선 정책으로 선회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8일 고유가 극복 민생종합대책에 이어, 13일에는 민생 회복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 계획도 확정지었다. 이런 입장 변화는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바람직하다. 비록 일회성이기는 하지만, 위기에 빠진 서민 생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그나마 그것이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당분간 성장의 유혹을 참아내야 한다. 금리와 환율을 통해 인위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발상은 이미 너무 많은 수업료를 지불했다. 필요하다면 거꾸로 금리를 올리고 환율을 내려 수입 물가를 잡을 필요성도 있다. 양동이 대신 양수기를 선택하고 물을 퍼 올려 뿌리다 보면, 천수답에도 어느덧 넉넉한 양의 물이 고일 것이다.

김방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