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100주년에 쌀 받는 사연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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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2008년 5월, 보인고등학교(옛 보인정보산업고) 김석한 이사장은 학교 동문과 주변 인사들에게 개교 100주년 행사 초청장을 보냈다. “5000만원의 성금을 모으는 보은의 100주년 행사”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김 이사장은 행사 때 화환·화분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쌀을 받겠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행사 때마다 화환이나 화분이 수백 개 들어오는데 낭비”라며 “쌀 20㎏씩을 받아 불우이웃을 돕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오금동 보인고 개교 100주년 행사장. 입구에는 화환 대신 쌀 70포대가 쌓였다.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20㎏ 쌀 한 포대 값인 4만~5만원씩을 보냈다. 이렇게 쌓인 돈이 3600여만원. 김 이사장은 여기에 돈을 더 보태 5000만원을 만들어 송파구 일대 무의탁 노인, 소년·소녀가장에게 쌀을 지원하기로 했다. 보인고 신현동 교장은 “송파구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를 제외하면 형편이 어려운 주민이 많다”며 “인근 학교와 복지기관 등과 연계해 지원 대상자를 선정해 이달 말께 쌀을 보내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보인고의 100주년 기념행사는 전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아 세워진 ‘창학정신’을 되살린 것이다.

보인고는 1908년 당시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현 종로구 내수동)에서 출발했다. 지금의 서울 송파구로 옮긴 것은 1977년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뒤 울분을 품은 군 출신 인사와 인달방 일대 지사들이 만든 보인학회가 ‘개명국민의 창조’를 기치로 학교 설립에 나섰다. 학교 측 사료에 의하면 당시 학회에는 인달방 일대에 살고 있던 인력거꾼·기생·노동자·상공인 등 500여 명이 가입했다.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당시 돈으로 270환을 모아 매입한 조그만 기와집 한 채가 학교의 출발이다.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댕기머리를 자른 45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 학교 교장을 지낸 김주경(77)씨는 “1900년대에 대거 세워진 민족사학은 대개 선교사나 뜻있는 양반층의 재력가가 중심이 됐던 학교”라며 “보인학교는 나라를 걱정하는 민초들이 중심이 돼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세운 사학”이라고 평가했다. 이 학교 동문으로는 조선휘 서울대 명예교수, 한환 전 경기도교육감, 김현욱 전 국회의원, 지휘자 곽승, 고 이득렬 전 MBC 사장 등이 있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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