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되살아난 ‘고아 돌보기’ 중국 전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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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쓰촨(四川)성 대지진은 중국의 오래된 전통 하나를 돋보이게 했다. ‘고아 돌보기’다. 요즘 중국에선 대표적인 언론들과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가 모두 나서 대지진으로 발생한 고아의 입양과 보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재난 현장에 빈번하게 가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도 그때마다 고아들이 있는 곳을 찾는다. 쓰촨성의 지역 신문들은 앞장서서 고아의 입양을 주선하고 있다. 재난 현장의 최대 매체인 사천일보(四川日報)뿐 아니라 대표적 포털사이트인 신랑(新浪·sina.com) 등 거의 모든 매체가 나서서 고아 문제 해결에 주력하고 있다.

재난을 겪으면 반드시 사회가 나서 고아를 적극 돌보는 것은 중국의 오래된 전통이다. 1976년 24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탕산(唐山) 대지진 때도 중국 공산당의 최대 역점 사업 중 하나는 고아 돌보기였다. 이번 대지진 때 고아 등을 위해 1억 위안(약 150억원)의 헌금을 낸 기업인의 이야기(본지 6월 3일자 16면)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그가 탕산 대지진 고아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고아 돌보기의 전통은 사회주의 중국 이전의 역사 속에서도 매우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고사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영웅 유비(劉備)의 이야기다. 그가 세웠던 촉한(蜀漢)의 왕실이 기울어 가던 때다. 그는 의형제인 관우(關羽)를 죽인 오나라에 복수를 하기 위해 현재의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 부근에서 전쟁을 벌이다 대패한다. 싼샤(三峽) 안의 백제(白帝)성에서 임종을 맞을 무렵 그는 뒤늦게 달려온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劉禪)의 능력이 부족하다며 나라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감명받은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면서 “죽을 때까지 (유선을 위해) 온몸을 다 바치겠다(鞠躬盡碎, 死而後已)”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고아를 맡기다’는 뜻의 ‘탁고(託孤)’라는 말이 나오게 된 유래다.

그에 앞선 춘추시기로부터 내려오는 ‘조씨고아(趙氏孤兒)’라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쿠데타에 밀려 가족이 모두 죽게 되는 진(晋)나라의 관료 조삭(趙朔)의 유복자를 두 막료가 살려낸다는 내용이다. 정영은 자신의 친아들을 조삭의 아들로 위장해 죽게 하고, 다른 한 막료는 정영의 아들과 함께 거짓으로 잡혀 죽는 아주 값비싼 희생을 치른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적혀 있는 이야기다. 지금까지도 중국 전통 오페라에 단골 소재로 올라 수많은 중국인의 마음을 울린다.

현대 중국에서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온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시절에 그의 2인자로 활약했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그는 지난해 공산당 17차 당대회(17大)에서 은퇴했지만 아직 중국 당·정·군 요인의 2세들을 일컫는 ‘태자당(太子黨)’의 리더다. 그의 모친인 덩류진(鄧六金, 2003년 작고)은 ‘붉은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사회주의 건국 전 상하이(上海)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며 전장에서 숨진 혁명 열사나 일선에서 싸우는 동료들의 자녀들을 돌봤기 때문이다. 쩡 전 국가 부주석이 장쩌민 국가 주석 시절 막강한 당·정·군의 인맥을 유지했고 현재도 중국 정치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배경에는 그의 모친이 돌본 수많은 고아와 혁명 원로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이 대지진의 복구작업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고아 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서는 데는 이런 전통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중국이 아직도 혈연과 종법(宗法)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儒家)적인 전통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는 관찰은 이래서 가능하다. 그러나 큰 재난을 당해 사회가 흔들리기 쉬울 때 ‘고아 돌보기’란 훈훈한 전통을 살려 사회 구성원의 정감적 유대감을 강화함으로써 국정 틀을 유지하는 중국 공산당의 대처 능력도 눈여겨볼 일이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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