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엄상빈과 함께 걷는 길 그리고 삶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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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체를 향하여 뚜벅뚜벅…

좁은 길만 골라 다니는 사람이 있다. 어두운 길, 소외된 길, 사라져가는 길을 찾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사진가 엄상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큐 사진작가인 그는 진즉부터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행하며 그의 작업을 엿보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엄상빈을 좇기 위해서는 몇날며칠이고 하염없이d 걸어야만 한다. 실제로 어느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그를 촬영하기 위해 몇 차례 사전작업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 떨어졌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히말라야 산맥까지도 오르는 세상인데, 골목이나 돌아다니는 사진가의 일상을 담아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랴 싶지만, 엄상빈에게는 히말라야 산맥과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건 엄상빈의 작업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평범한 민초들의 삶은 마치 모세혈관과도 같이 미세하고 복잡하게 펼쳐진다. 엄상빈은 그 모세혈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다. 따라서 그를 뒤따르는 일은 지구력 그 이상의 힘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거기에는 히말라야 등반에 맞먹는 희열감 같은 것이 없다. 그저 삶, 그리고 또 삶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라 걷는 것은 묵묵히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진득한 철학이 필요한 일이다.
워크홀릭이 뚜벅이 사진작가 엄상빈과 함께한 시간은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그의 길에 동행했다.

허름한 청바지와 베레모 차림은 아닐까? 헌데 정작 엄상빈은 갓 교회를 다녀온 신도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정장을 갖춰 입은 것도 아니었다.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그가 입은 것은 어쩌면 원초적 단정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전직 수학교사였던 탓일 수도 있겠다. 그는 20년 동안 교단에서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저 취미생활처럼 해오던 작업을 한 단계 진화시키게 된 것은 상명대 예술대학원에서 진학해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 그러나 용감하게 삶의 행로를 바꾸어 버렸다.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진이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 큰 가르침을 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진의 길로 들어선 후 가장 먼저 했던 일도 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교사 생활을 할 때보다는 조금 더 가난해졌고 조금 덜 안정적으로 살게 됐지만, 대신에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틈틈이 전시회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발목을 붙드는 특정 피사체와 풍경이 자꾸만 마음에 남았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슬픈 사연을 품고 있거나 암담한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이를 테면, 사회적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이 자꾸만 그의 렌즈 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가 최근 작업한 사례를 작가의 음성으로 들어보자.

엄상빈 - 이 사진은 제가 아주 어렵게 찍은 사진이에요. 사진 속 주인공은 1948년 생 정무현 씨이고요. 이 사진을 찍기 이전에 원래 촬영해뒀던 것이 있었는데 어쩐지 그 사진을 쓰기 싫더군요.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제 스타일인데 이번만큼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럴 수 없었어요. 이 남성분은 전쟁 때 부모를 잃고 어린 누나와 함께 너무 힘든 삶을 살았어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 뭐 따로 있나요. 끄덕끄덕 코앞에 닥친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였죠. 일찍 기반을 잡아보려고 겨우 열여덟에 지금의 부인 우재남(60)씨와 결혼했는데 아내분 역시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서모 시집살이를 하느라 혼났답니다. 공사판이며 광산을 전전하며 어떻게 해서든 가난에서 벗어나보려 애쓰며 살았지만 무언가 손에 잡힐 만하면 사고가 나거나 병이 생겼죠. 지금은 그나마 자식들이 있어서 덜 외롭지만 그 지긋지긋한 가난은 아직도 이들 부부를 떠나지 않고 있답니다. 그러니 그들의 힘든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사진을 볼 때마다 제가 속이 상했어요. 언제 기념사진 한 번 찍을 일이 없는 양반들인데 이번 한 번만이라도 보기 좋은 것으로 하나 만들어드리는 것이 어떨까 자꾸 사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어느 날 전화를 걸어 여쭤봤어요. 한복이나 양복을 입고 다시 찍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랬더니 이분들 하시는 말씀이, 양복이라곤 가져본 적도 없다는 겁니다. 그때 제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었는데, 그 전화를 끊고 홀로 거리를 걸으며 울었습니다. 그리곤... 잠바라도 하나 사다 드리면 결례가 될지 괜찮을지 혼자 고민했어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분 누님댁에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제사가 있다고... 제사 지내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자니 옳거니 싶었어요. 부랴부랴 달려가서 얻은 사진이 바로 이 작품이죠. 이분들의 순박한 분위기도 잘 우러나고 주변 이미지가 깔끔해서 아주 만족합니다. 적어도 이분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 눈에 허름하게 느껴지는 것은 싫거든요. 정말 힘든 시기를 말없이 버텨준 이들 민초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설은영 객원기자 e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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