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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33. 대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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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가 시나리오를 썼던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의 한 장면.

"굿 나잇 스위트 하트." 희미한 불빛 아래 서로 껴안은 채 얼굴을 대고 춤추는 남녀들의 모습은 평화롭기만 하다. 빼앗고 빼앗기고 있다는 서울의 전투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만 같다.

마담이 한 미군 대령의 품에 안겨 춤을 췄다. 그녀 뒤의 스탠드에서 항상 그녀를 감시한다는 기분이 들었던 나는 이상하게 질투심을 느꼈다.

장교들도 많이 오고, 술도 잘 팔리고 댄서들과의 어울림도 순조로운 것 같아 댄스홀 영업이 잘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적자라고 했다. 어째서 적자인가. 여종업원들의 서랍에는 군표.그린백 등이 가득한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쳤다. 내가 몰고 다니는 스리쿼터에 마담을 태우고 그녀의 숙소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차량의 앞 유리를 후려치는 비바람 때문에 엑셀러레이터를 밟을 수 없어 기어가다시피 했다. 간신히 그녀의 숙소에 갔을 때는 천지개벽인가 싶을 정도로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비가 좀 수그러들 때까지 들어와 있으라고 했다. 깔끔한 살림이었다. 립스틱을 바르고, 양장하고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까닭을 알 만했다. 아들 둘에 딸이 셋이라며 앨범을 펼쳐 보였다. 부군은 미국에 가 있다고 했다.

바깥 폭풍우가 좀처럼 기세를 꺾지 않았을 때 그녀는 맥주를 내놓았다. 우리 홀에만 있는 맥주다. 이렇게도 새나올 수 있구나 했지만, 모른 척 그냥 마셨다. 술에 약한 나는 금세 취했다. 취한 내 눈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이 점점 신비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신비가 29세의 내 몸과 마음에 살며시 불을 붙였다. 그 불은 서서히 번져가다 확 타올랐다. 그날 밤은 내 인생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이튿날 하늘과 바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고요했다. 어머니가 밤새 잠을 못 이루셨다고 했다. 시를 읊어드릴까요? 러시아의 에세닌이 그랬어요.

"어머니, 오늘도 마을 어귀에 나와 저를 기다리지 마세요. 저는… 저는요…." 망가진 자신을 개탄하던 에세닌.

"얘야, 그 아이 어떻게 됐니? 여기까지 나를 데려다 준 그 아이…."

"모르겠어요."

"그래도 되는 거냐? 아이가 착하던데…."

"어디 가 있겠지요."

"맘에 걸리는구나. 사람이란 은혜를 알아야 되는 것 아니냐?"

할 말이 없다. 나는 나쁜 놈으로 돼 있을 거다. 배은망덕의 극치. 한번이라도 홍태조라는, 그 어려운 시기에 서울에서 나를 감싸주던 여인을 걱정해본 적 있는가. 순도 100%의 죄악이었다. 30년 동안 그녀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절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는가.

1962년 KBS에서 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의 극본을 쓴 적이 있다. 유현목(兪賢穆)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연상의 여인과의 연애 이야기다. 크게 히트했다. 이민자(李民子)와 신예 신성일(申星一)의 대결. 신성일은 그 뒤부터 우리나라 청춘영화의 주인공을 도맡다시피했다. 뒷날 김지미(金芝美)가 다시 한번 영화화했으나 찜찜한 것이 있었다. 섹스 장면이 너무 잦았던 것 같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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