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將 계급장 단 ‘붉은 간첩’ 리커눙<上>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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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 38면

1936년 1월 옌안에서 홍군 연락처장을 맡고 있던 리커눙. 김명호 제공

1955년 9월 27일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마오쩌둥(毛澤東) 주재하에 인민해방군 계급 수여식이 열렸다. 28년 전 8월 1일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의 무장봉기를 기점으로 장정(長征)과 항일전쟁, 국공전쟁, 한국전쟁 등 무수한 전쟁터를 누빈 사람들이었지만 30년 가까이 직책만 있었지 계급은 없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

10원수(元帥), 10대장(大將)과 함께 55명의 상장(上將)이 탄생했다. 하나같이 그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전장에서 날을 지새운 사람들이었다. 이날 마오쩌둥은 실전을 지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리커눙(李克農)에게 일급8·1훈장, 일급독립훈장, 일급해방훈장과 함께 상장 계급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7년 후 리커눙이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이 거행됐다. 중공 중앙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제주(祭主)였고 천윈(陳雲), 둥비우(董必武), 덩샤오핑(鄧小平), 천이(陳毅), 리센녠(李先念) 등이 부(副)제주였다. 부총리 정도는 돼야 명단에 끼일 수 있었다. 월남의 호찌민(胡志明)과 북한 외무상 김광협(金光俠)의 조문이 있었고 각국의 주중 대사와 무관들이 전원 참석했다. 한결같이 ‘정보의 천재’를 잃었다고들 했지만 정작 그가 했던 일이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그를 적대시하던 쪽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고 좋아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사흘간 할 일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자(死者)의 지위와 지명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고 장엄한 영결식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이날 참석한 여러 사람은 이미 30년 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사람들이었다. 영결식은 “당(唐)의 명신(名臣)이었던 방현령(房玄齡)도 리커눙에게는 미치지 못했다”는 둥비우의 조시(弔詩)로 끝을 맺었다.

‘붉은 간첩’ ‘호랑이 굴에 태연히 들어가는 사람’ ‘늑대와도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는 사람’ 등이 리커눙의 별명이었다. 국민당 정부의 국방부 작전처장을 비롯해 국방부장·참모총장의 보안담당 비서를 공산당원으로 만들었고, 상대편의 극비 자료를 다음날 아침 홍군(紅軍)의 해당 지휘관들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사람이 리커눙이었다.

리커눙은 중학생 시절 ‘자퇴 운동’을 주도해 머리 큰 대학생 운동가들의 넋을 잃게 한 적이 있었다. 27세 때 공산당에 가입했고 2년 후 당의 지시로 상하이로 갔다. 의사이며 연기자인 첸좡페이(錢壯飛), 영화배우 후디(胡底)와 함께 국민당 특무 조직인 중앙조사통계국(중통)에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중통의 책임자는 김구(金九)의 『백범일지(白凡逸志)』에도 등장하는 쉬언쩡(徐恩曾)이었다. 세 사람 모두 쉬의 비서 등 최측근이 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쉬언쩡은 여자친구가 많았고 부인을 무서워했다. 여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부인이 현장을 급습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곤 했지만 세 사람을 측근에 둔 다음부터는 걱정이 없었다. 항상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고 부인을 잘 따돌리는 리커눙 덕분에 부인과 조우할 일이 없었다. 쉬언쩡이 여자친구를 만나는 사이 사무실에 있던 기밀문서들이 통째로 털리곤 했다.

1931년 4월 공산당 중앙위원인 중앙특과의 책임자가 우한(武漢)에서 체포됐다. 상하이에 은신해 있던 공산당 지도부의 소재지를 줄줄이 불어댔다. 일망타진될 뻔했던 지도부는 세 사람 덕택에 안전하게 피신했다. 저우언라이도 여자로 변장하고 피신해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 세 사람을 찬양하는 ‘용담3걸(龍潭三杰)’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첸좡페이와 후디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남은 리커눙은 두 사람의 몫까지 다했다. 동북군에 단신으로 침투해 시안(西安)사변을 발발케 했고,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으로 유도한 것도 그였다. 일제가 항복한 후 장제스가 제의한 충칭(重慶) 담판에 마오쩌둥이 응한 것도 리커눙의 정보 분석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베이징 입성 후 80만 명에 달하던 국민당 특무를 단시일 내에 소탕한 것도 리커눙이었다. 그러나 리커눙의 진수는 한국전쟁 휴전과 제네바 회담을 통해 보여준 협상 능력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기까지 발생했던 굵직한 사건치고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지 않은 것은 없었다. 다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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