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엔 경제 지원, 남엔 미래 이익 ‘윈-윈기금’ 비축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5일 중앙일보 방북단이 대동강 하구 남포의 서해갑문을 찾았다. 강을 막아 8㎞ 길이의 거대한 둑을 쌓은 이곳의 곽일룡 지배인은 “초기 투자가 많이 들어가기는 해도 이 일대와 인근의 영남이 조선소 건설의 최적지”라며 “서해갑문으로 조수간만을 막았고 수송 조건도 유리해 서해에 이만한 장소가 없다”고 강조했다.

남한의 투자를 적극 권유하는 설명이었다. 이곳에서 8㎞ 상류로 올라가면 영남 배수리공장이다. 북한은 남한의 도움을 받아 노후한 이 공장의 시설까지 전면 현대화하기를 원한다. 배수리공장의 문희명 지배인은 “배수리공장 옆의 부지는 조선소 건설의 최적소”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조선소 건설과 시설 현대화에는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다. 여기서부터 정부의 고민이 시작된다. 정부의 대북 지원 예산은 남북협력기금에서 나온다. 그런데 올해 기금 중 이런 ‘경제협력기반조성+경협 융자금’ 사업에 쓸 지출로 잡아 놓은 금액은 4000억원 정도다. 이 속엔 북한이나 대북 사업을 하는 기업에 지원될 수 있는 융자 예상금(2637억여원)까지 포함돼 있어 실제 운용의 폭은 더 좁다.

올해 기금의 남북협력계정 전체 사업비는 1조1000여억원이지만 이산가족 상봉 행사나 남북 간 각종 교류 행사 지원, 가동 중인 개성공단 지원처럼 이미 ‘나갈 돈’이 들어가 있어 대규모 신규 지원이나 투자는 여의치 않다.

이처럼 기금 자체의 규모가 한정돼 있다 보니 그간의 대북 지원은 북한 식량난과 같은 발등의 불을 끄는 데만 주로 쓰였고 중장기적인 대북 지원 계획은 구상조차 어려웠다.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실제로 사용된 남북협력기금은 총 2조9600여억원이었다.

그러나 이 중 59.3%(1조7500여억원)는 쌀·비료·수해 복구와 같은 긴급 구호성 지원에 쓰였다. 남북 경협엔 절반에도 못 미치는 1조1400여억원(38.6%)만 지원됐다. 조선소 건설과 같은 대규모 대북 SOC 지원이나 북한의 식량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종합적 대책은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김연철 고려대 교수는 30일 “이러다 보니 대북 지원은 계속됐지만 그 효과는 단기 처방에 그쳐 퍼주기 논란만 계속됐다”고 말했다.

지금부터 국회와 정부가 예산 1%의 기금 적립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북·미 관계의 개선에 따른 동북아 정세의 급격한 변화 가능성에 주목한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북한과 일본이 수교 협상 테이블에 앉는 상황은 북한이 국제질서에 편입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한반도의 당사자인 우리가 그때 해야 할 일은 북한에 대한 효과적인 지원과 투자”라고 말했다. 북한의 개발을 본격 지원하면서 그 과정에서 우리 기업의 진출을 돕기 위해선 지금부터 종자돈을 모아 ‘한반도 투자기금’으로 만들자는 얘기다.

관건은 재원 마련 방안이다. 남북협력기금은 2000년 이후 지난해까지 매년 정부가 1000억원(2000년)에서 6500억원(2006년)까지 출연했다. 기금법에는 민간에서 기금을 출연토록 허용했지만 1991년부터 더해도 민간의 지원은 23억원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산 1%의 기금 적립을 위해선 민간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각에선 아예 남북협력기금과 별도의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대북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강영식 사무총장은 “남북협력기금은 이산가족 상봉이나 기존 대북 지원·투자를 맡고 민간의 참여를 독려한다는 차원에서 정부·민간이 공동으로 다른 기금을 조성, 대형 대북 지원·투자를 준비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기금의 1% 적립과 함께 그 운용 방안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적립된 기금이 향후 북한에 대한 ‘단순 지원금’이 아니라 남북 모두에 도움이 되는 ‘남북 투자금’이 돼 북에는 지원이면서 남에는 미래의 이익이 되는 ‘윈-윈’이 돼야 한다는 제안이다.

김연철 교수는 “영남 배수리공장 지원에 나설 경우라면 단순히 정부가 인프라 구축만 해주는 데 그쳐선 안 되고 조선업계가 함께 진출해 사실상 정부로부터 경제성을 보전받는 형식이 돼야 윈-윈의 효과가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채병건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