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이재오-① 일월산 촌놈 대학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week&이 ‘종횡무진 인터뷰’를 선보입니다. 세상에 호기심 많은 ‘시골의사’ 박경철씨가 인터뷰어로 나섭니다. ‘예쁘고 착한’ 인터뷰가 아닙니다. 뻔한 질문 하지 않습니다. 판에 박힌 대답은 버리겠습니다.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점을 콕콕 찍어냅니다. 정치인·기업인·예술인·대중문화인… 가리지 않고 만나러 갑니다. 그때그때 형식이 달라집니다. 격주로 찾아갑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첫 번째 만난 사람은 한나라당 이재오 전의원입니다.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 간사였던 박경철과 집권 한나라당의 실세 이재오, 불꽃 튀는 14시간이었습니다.

◈ [동영상] 한나라당 실세 이재오 '불꽃튀는 14시간 인터뷰' | [화보]



(17대 국회의 임기는 29일로 끝났다. 인터뷰 시점 상 여기서는 ‘이재오 전의원’을 ‘이 의원’으로 싣는다.)

자의 반 타의 반

"워싱턴에 왜 가시나요?" "길이 있으니 가는거지." "혹시 찾는 길이 '돌아오는 길' 아닌가요?" "글쎄, 허허."[사진=권혁재 전문기자]

1964년 소위 ‘6.3사태’의 희생양이 된 2인자 김종필은 당의장직을 사임하고 외유 길에 오르면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로부터 꼭 40년이 지난 2004년 12월 당시 ‘6.3 학생운동’의 주역들로 구성된 ‘6.3 동지회’는 차기회장으로 이재오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다시 4년, 2008년 5월 26일 현 정권의 2인자인 이재오 역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늘 인터뷰 주인공은 바로 그다.
인터뷰를 위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다. 인터뷰는 승부다.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겠다는 방어막을 친 상대의 내밀한 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매체를 통해 알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는 대개 굴절된 상이기 쉽다. 그것을 전하는 측의 편견이 있고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것이 악취이건, 향취이건 고유의 향기가 있다. 그래서 정치인 이재오의 인터뷰는, 사람에게 밀랍을 씌어 냄새를 고정하고 그것으로 향수를 만들어 낸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처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투사가 된 일월산 촌놈

5월 20일 이른 아침 서울 은평구 예일여고 정문, ‘남산산악회’ 안내판이 붙은 관광버스 몇 대가 서 있고, 안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다. (이재오 의원의 호가 ‘남산’ 이다). 약속한 7시 50분, 정각 흰색 카니발 한 대가 멈추고, 등산복을 차려 입은 이재오 의원이 내려섰다. 대개 정치인과의 악수는 유쾌하지 않다. 의식적으로 상대의 손을 강하게 쥐는 습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재오의 악수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의 두터운 손에서는 흙 냄새가 났다. 카니발은 먼 거리 여행에 적합하도록 뒷좌석이 개조되어 있었다. 이 의원의 옆자리에 타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정치인 이재오의 그릇을 알고 싶다. 곤혹스럽고 무례한 질문이 많더라도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노회한 직업정치인을 상대로 에둘러 말하거나, 입에 발린 수사를 남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어차피 상대는 선수가 아니던가?

(모든 인터뷰는 상대가 원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래야 다음이 원만하다.)

- 고등학교 때부터 활동이 남달랐다고 들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4H활동을 시작했고, 영양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고등학생신분으로 영양군 4H 회장, 고3 때 경북 부회장을 했었지요, 그 당시에는 농촌운동이지 사회운동이라는 인식은 전혀 없었어요. 그 외에는 웅변에 재주가 좀 있어서 상을 꽤 받았고, 문예반을 만들고 했지만, 그래도 촌에서 그래 봐야… 허허

‘촌’에서 그래봐야…라며 웃었지만, 그는 이후로도 ‘촌’,혹은 ‘촌놈’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강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BYC 벨트, 경북 북부지방에서 오지에 해당하는 봉화, 영양, 청송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 영양이고. 그는 그곳에서 초·중·고를 모두 마쳤다.)

- 대학은 서울로 가셨지요?

아.. 바로 간 건 아니고요. 고등학교 마치고 군에 공무원으로 특채 됐어요,. 그런데 여름방학이 되니 대학간 친구들이 내려오더군요.. 그때만해도 영양에서 대학에 몇 명 가기나 하나? 하여간 그 친구들하고 천렵하고 멱감고 놀다가 갑자기 ‘대학가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그는 그 이유를 스스로가 ‘왜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군수가 요즘으로 치면 ‘과학영농단지 시범사업’ 같은걸 그에게 맡겼다. 말하자면 당시 영양에서는 촉망 받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 후 군에서 그에게 미국연수를 제안했지만 그는 대학진학을 결정한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갈림길이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그는 그 뒤 무려 45년이 지나서야 무거운 걸음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만약 그때 미국연수를 떠났다면 지금의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갑자기 대학에 가겠다니 주위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아버지는 ‘학비는 못 대준다. 하지만 반대는 안 하겠다’고 하시고 군수와 농촌지도소장은 아깝다고 하데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에게 대학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1963년 9월 군에 사표를 내고 가족들에게 당분간 농사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길로 대입교재를 몇 권 사서 골방에 들어앉아 달달 외웠다. 대학에 가는 길은 장학금을 받는 길뿐이었다. 그리고는 그 해 입시에서 중앙대 농촌경제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전액장학금을 받는 대학생이 된다. 그가 들어간 중대 농경제학과는 농과대학이 아닌 상경대학이었다. 그 이유를 농촌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 그 뒤 학생운동에 바로 뛰어 드셨나요?

처음에는 과대표를 맡았어요. 그래서 저절로 학생회에 참여했죠. 그때만해도 순수하게 농촌을 공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리고는 4H 전국연합을 결성했고, 농어촌 사회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들고 그랬지요..

그는 태생적인 운동가였다. 중학교 때 4.19가 나자 영양군내 중고생을 모아 거리데모에 나섰고, 그 길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순수한 농촌연구모임이었지만 그는 늘 모임을 주도했고, 리더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5.16’ 이나 ‘군사정권’과 같은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은 없었다고 했다.

- 그럼 6.3 때는 어떤 문제의식이 생기던가요? 소위 ‘학습’을 받았나요?

하하 그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나뿐 아니라 당시 대학생들이 모두 ‘굴욕적’이라고 느꼈던 거요. 특히 ‘약탈 문화재 반환’과 같은 중요한 문제들이 조약에서 빠진 것은 민족정신을 팔아먹은 것이라 여겼죠.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지금 미국산 소 수입 협상을 두고 굴욕적이라 말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확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는 강의실을 돌면서 데모를 선동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는 단지 정의감에 불탔고, 친구들을 독려했을 뿐이었다. 그때만해도 ‘투사 이재오’가 아닌 그저 ‘촌놈 이재오’였던 셈이다. 하지만 64년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학생회 간부들이 모두 체포되고 학생회가 마비되자, ‘한일회담반대 구국 투쟁위원회’라는 임시 학생기구가 만들어지고 그는 거기에 가담한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 갈림길이었다. 만약 6.3 사태가 없었다면 그의 인생행로는 다시 한번 달라졌을 것이다.

- 그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에 나서게 된 건가요?

아니.. 사실은 그때까지도 사회의식이 없었어요. 그냥 한일회담은 아니다 싶었고, 주동자들이 전부 뒤로 숨거나 잡혀간 다음에, ‘니가 나서라’ 하니까 어리숙한 촌놈이 그냥 앞에 나선거지 뭐…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죠..

65년 대학 2학년 때 국회에서 비준안이 통과되고, 그는 ‘중앙대 비준반대 전국학생연합’에 가담했다, 이후 위수령이 내려지고 ROTC 합격발표를 보러 간 그에게 ROTC 연대장이 수배사실을 알려줬다. 그 해 12월 친구 집에서 체포되어 학교에서 제적처분을 받는다.

- 어렵사리 입학한 학교에서 제적되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솔직히 걱정도 안 했어요. 뭐 군대 갔다 오면 다시 복교시켜주겠지 싶었고, 그 뒤 강제징집 돼 군에 가니까 차라리 시원섭섭하데요. 군에서도 처음에는 학생운동 출신이라고 신경 쓰다가 그 다음부터는 촌놈이다 싶었는지 그냥 내버려 둡디다.

그는 포천에서 공병으로 근무하던 군 시절 월남전에 차출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한다. 그 이유 역시 ‘남의 나라 전쟁에 괜히 왜 가나’ 정도였을 뿐, 군사독재라든지, 반미라든지 하는 개념과는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부족하던 농어촌 교사를 충원하기 위해 현역병 중에서 이동중학교 교사를 선발하는 시험에 합격했고, 나머지 2년간 이동중학교 국어교사로 복무한다. 그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회고한다. 학생들과 운동장을 다지고 교사를 짓고, 토끼도 잡으러 다니고 진짜 딱 체질에 맞는 일이었다고 한다.

- 제대 후에 복교 신청을 했었나요?

음, 거부당했어요. 향후 정치일정상 골치 아픈 녀석들이 학교로 돌아오면 곤란해진다고 생각한 정부에서 입학불허 지시를 한 거지요. 그때 처음 ‘부조리함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그때 처음으로 군사정권에 대한 자각을 했다고 한다. ‘개인의 행복은 사회적 조건이 가능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것을 그는 ‘부조리함’ 이라고 표현했다.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을 한 것이 올가미가 된다면 그것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이재오 인터뷰]"처음엔 '니가 나서라' 하니까 촌놈이 그냥…"

▶[이재오 인터뷰]수업중 이근안에게 체포돼 교사생활 마감

▶[이재오 인터뷰]YS 찾아갔더니 "정치는 국회의원 되는기라"

▶[이재오 인터뷰]"대통령 형과 권력 권력 다툼? 내가 등신도 아니고"

▶[이재오 인터뷰]"솔직히 답해달라, 대통령이 꿈이냐" 질문에

▶[관련화보] 이재오 전 의원 인터뷰 현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