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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이재오-② 투사 이재오로 다시 태어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week&이 ‘종횡무진 인터뷰’를 선보입니다. 세상에 호기심 많은 ‘시골의사’ 박경철씨가 인터뷰어로 나섭니다. ‘예쁘고 착한’ 인터뷰가 아닙니다. 뻔한 질문 하지 않습니다. 판에 박힌 대답은 버리겠습니다.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점을 콕콕 찍어냅니다. 정치인·기업인·예술인·대중문화인… 가리지 않고 만나러 갑니다. 그때그때 형식이 달라집니다. 격주로 찾아갑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첫 번째 만난 사람은 한나라당 이재오 전의원입니다.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 간사였던 박경철과 집권 한나라당의 실세 이재오, 불꽃 튀는 14시간이었습니다.

◈ [동영상] 한나라당 실세 이재오 '불꽃튀는 14시간 인터뷰' | [화보]



(17대 국회의 임기는 29일로 끝났다. 인터뷰 시점 상 여기서는 ‘이재오 전의원’을 ‘이 의원’으로 싣는다.)

투사 이재오로 다시 태어나다

1971년 이재오는 당시 한일회담 반대운동 출신들인, 백기완, 문익환, 계훈제 등의 제적생, 출교 교수,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민주수호청년협의회’를 결성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수호국민회의’라는 명망가들의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투사 이재오가 시작한 반독재 투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되자. 활동공간이 사라진 이재오는 고교교사 시험을 쳐서 ‘장훈 중학교’ 국어교사가 된다.

- 두 번째 교사 경험도 행복했었나요?

아니었어요. 이미 의식에 눈을 뜬 상태였기 때문에 첫 번째와는 달랐죠. 그때는 가슴에 의기나 분노가 가득 차오르던 시절이었어요.

그 해 12월 유신에 반대하는 최초의 데모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수업 중에 이근안 경감에게 체포되어 두 번째 교사 생활이 끝난다. 당시 내일신문 장명국 사장등과 함께 담당 검사였던 이한동 전 총리에게 조사를 받고 징역 1년6개월 형을 받았다. 출소 후 그가 다시 택한 길이 다시 교사였다. 그때 의식 있는 교사들을 모아 극단 ‘상황’을 결성한다.

- 그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연극을 하셨습니까? 음색이 연극에 적합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 배우를 한 건 아니고 연출을 맡았어요. 당시 극단 초연작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작품이었는데, 그때는 연극에 한동안 미쳐 있었어요. 거창하게 반유신예술운동을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던 거죠. 하하.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웃음에 습기가 끼어있었다. 그 시절에 대한 추억과 자부심이 강해 보였다. 그는 당시 ‘이민’이라는 필명으로 연극연출, 연극평론을 쓰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오류동에서 지미 카터가 박정희 전대통령을 호되게 꾸짖는 단막극을 공연한 다음 내부고발로 2번째 구속이 된다.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출소 후 엠네스티 한국사무소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 즈음 1979년 6월 안동교구의 가톨릭 농민회 임원이었던 '오원춘'이라는 사람이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 감금되는 소위 ‘오원춘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의 간접적인 인연으로 이어진다.

- 그 얘기 좀 들려주시죠?

오원춘 사건으로 안동에 내려갔어요. 낮에 점심을 먹느라고 안동댐 주변 식당에 갔는데 댐 초입에 커다란 돌이 하나 서 있더라고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 방생기념비’ 뭐 이런 거였죠. 그걸 보면서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그 뒤로 돌아가니 구석진 곳에 자그마한 비석이 하나 서 있어요. 댐 건설과정에서 순직한 건설근로자가 스물댓 분 되는데 그분들 ‘위령비’였죠. 그걸 보고 ‘아, 근로자 목숨이 물고기보다 못한 이런 게 독재정권이구나.’라는 걸 새삼 깨달았죠. 어찌 보면 그게 박근혜 대표와 나의 첫 인연이라면 인연이죠..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눈길이 차창 밖으로 고정되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30년 후에 그녀를 ‘독재자의 딸’ 이라고 부르며 치열한 권력전쟁을 벌이게 될 줄 자신인들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로 인해 낙선자가 되어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그를 보며 그것이 인연이라면 참 길고도 질긴 인연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그날 밤 안동시내에서 촛불시위를 주도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세 번째 옥살이를 한다.

- 그때부터 본격적인 투사의 길로 들어선 건가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10.26이 터지고 전두환씨가 권력을 잡았죠, 그 즈음 극단 상황 멤버를 중심으로 ‘한민투’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어졌는데, 그 멤버 중에 2명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었어요. 그걸 빌미로 한민투가 남민전 산하조직으로 엮여 들었어요. 나는 석방과 동시에 4번째로 다시 구속이 됐어요. 그렇게 4년 반을 살고 나니 84년에 특사로 풀어 줍디다.

그쯤 되면 감옥이 이골이 날만도 한데, 감옥생활이 그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정치범이라 독방을 쓰면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했고, 출소와 동시에 다시 민통련 간부와, 전민련 조국통일 위원장 등을 맡으며 80년대 민주화 운동 대열의 전면에 선다.

-그로 인해 5번째 감옥생활을 시작한 거고요?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시절에 제 1회 범민족대회가 열렸어요,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했는데, 그때는 정말 나도 그 사실을 몰랐어요. 방북이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거죠. 하지만 그게 계기가 돼서 5번째로 구속됐는데, 그때 감옥에서 ‘민족과 통일’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 전까지는 반독재투쟁이 전부였다면, 그로서 마지막 자각을 한 셈이죠.

‘시대가 투사를 만든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는 ‘내 인생 자체가 바로 해방 후 격동의 30년 그 자체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동의를 하건 않건, 옳건 그르건 해방둥이로 태어난 그의 인생이 그 시점에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과의 기나긴 대척점에 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했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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