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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시에 나타난 눈-평화와 설렘에서 상실감까지 형상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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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이달 초 첫눈이 내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첫눈은 아직 오지 않았다.
「눈.이.내.린.다」는 이미지를 마음속에 불러오지 못했기 때문인듯. 눈을 귀가길 교통체증의 원인이나 아황산 가스에 오염된산성물질로 여기는 도시인들에게도 눈은 여러가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고향의 산과 들,마을을 하얗게 뒤덮는 평화며 학창시절 교정에 내리는 설렘이며 영혼의 맑음일 것이다.또 한편으로는판자촌의 가난을 평등하게 덮어주는 위안이며 시대의 불의와 뒤섞여 내리는 상실감일 수도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눈을 그린 시(詩)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형상화된다. 마음속의 흰눈 위에 발자국을 하나씩 박아 넣으며 근작 시속으로 난 길을 걸어가보자.
김정란 시인에게 눈은 영혼이 탄생한 시원의 공간으로 통한다.
『눈이 내리고/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맨발로/달려가는 소리를 듣는다/태초에,우리가 꿈이었을 때/우리가 애벌레의 날개이며 봄의 움이며/神의 숨결이었을 때/그때,우리가 그렇게 작은 소리로속살거렸듯이』(「눈」 중에서).
김정환에게 그것은 화사한 축복이다.
『눈 내리는 아침/나무들은 잘하고 있어요/나뭇가지의 집은 하얗고 푹신하고 축 늘어지고/저렇게 환하게 서 있을 수가 있어요글쎄/멋져요.나뭇가지가 있는 아침은 춥고/화사하셔요,눈이 펑펑쏟아지는 아침은/온 산,온 경치가 새하얀 이 아침에 온통』(「눈 나뭇가지 너,나 그리고 고통」 중에서).
지난해 동해안을 5시간 달려간 황동규에게 눈은 찬란함이다.
『눈보라가 일었다/불 붙이기 싫어/라면을 끓이지 않았다/딱다구리 나무 쪼으는 소리 울릴 뿐/마을에도 겨울엔 밥집이 없었다/눈보라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열자/찬란한 산들이 기척없이출몰했다』(「내린천을 찾아서」 에서).
원재훈이 지난해 발표한 「아름다운 세상」은 가벼운 그리움을 말한다. 『눈이 쌓여서 아직 얼지도 녹지도 않아 부드러울 때,나의 가벼운 입김으로 후 불면 흩날리어 세상의 아주 먼 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반짝이는 그 가벼움으로 나는 하루종일 그대 생각을 한다.』 눈의 연가집 『설연집』을 쓴 강우식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사람아,눈이 풋풋한 해질녘이면/마른 솔가지 한 단쯤 져다놓고/그대 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저 소리없는눈발들이 그칠 때까지….』(『설연집 3』).
시인들이 눈속에서 낭만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정호승에게 그것은 세상을,판자촌을 포함해 동일한 색으로 덮어주는 일시적인 평등이 가져다 주는 위안이다.
『눈이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가난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빚잔치를 하고 고향을 떠나/숟가락도 하나 없이 식구들을 데리고/믿는도끼에 찍힌 발등만 바라보며/내 집 한 칸 없이 살아오신 아버지/눈이 오는 날이면 언제나/가난하였으므로 행복 하였다』(「아버지」전문).
이시영의 눈은 불의에 스러져가는 뭉클한 상실감으로 내린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나라에/눈이 내린다/알지 못할 한 마디 맹세가/시퍼렇게 떨다가 스러지고/(중략)/누구도 들을 수 없는나라에/소리가 내린다/소리 뒤에 주먹처럼 고요히 내린다/(중략)/잃어버린 자들의 가슴에 뭉클한/손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중에서).
눈 자체의 강력한 힘을 묘사한 것으로는 최승호의 「대설주의보」가 꼽힌다.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제설차 한 대 올리 없는/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굴뚝새가 눈보라 속을 날아간다/길잃는 등산객 있을 듯/외딴 두메마을 길을 끊어놓을 듯/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포근하게 눈 내리는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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