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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래한 도시, 서울이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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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12면

『서울 이야기』정기용 지음, 현실문화연구 펴냄, 2만5000원.『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황두진 지음, 해냄 펴냄, 1만원.『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권기봉 지음, 알마 펴냄, 1만6500원.『서울의 밤문화』김명환·김중식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1만7000원.『서울은 깊다』전우용 지음, 돌베개 펴냄, 1만8000원.

“서울을 다녀간 거의 모든 사람은 런던·파리·로마·빈 같은 다른 나라의 수도와 마찬가지로 점점 서울을 좋아하게 된다. 감출 수 없는 서울의 매력은 어떤 묘사나 정보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유려한 문체의 에세이스트가 쓴 이 글이 정녕 서울에 대한 찬사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위 문장에서 ‘서울’은 실은 ‘베이징(北京)’이다. 중국의 저명한 수필가 린위탕(林語當)이 1961년 펴낸 『베이징 이야기』(이산)의 한 대목을 멋대로 고쳐봤다.

미국·독일·싱가포르·홍콩을 넘나들며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았던 그는 자연과 예술, 인간의 삶이 어우러진 베이징의 ‘불가사의한 매력’을 기후·건축·풍속·지형 등으로 차근차근 풀어냈다. 미국 학자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도쿄 이야기』(이산)가 봉건 에도에서 근대화된 대도시로 변해 온 도쿄의 도시문화사를 압축해 보여 줬듯, 베이징은 린위탕의 저술을 통해 수세기의 깊이를 간직한 현대의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6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 역시 숱한 사람의 생활방식과 창조적 성취를 담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서울을 말할 때 얼마간 망설임이 인다. 얼마 전 서울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해치’가 결정됐을 때 갑론을박이 끓었던 데서 보이듯, ‘이것이 서울’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함이 있다. 20세기 초 불과 10여만 명이던 인구는 100년 새 100배로 늘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욕망을 분출하며 일상의 궤도를 돈다.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 급속한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은 기억의 소멸이 미덕인 공간이 돼 버렸다. 그래서 『서울 이야기』를 쓴 정기용 건축가는 서울을 “오직 쓰기만 하고 한번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대하소설”이라고 명명한다.

서울을 들여다본 책 중엔 유독 건축가가 쓴 것이 많다. 건축이 본래 어떤 영속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면, 십몇 년 된 건물도 재개발의 명목하에 무심히 헐려 나가는 서울이란 도시는 참으로 좌절스럽다. 그래서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에서 황두진 건축가는 서울의 건축가를 ‘북극의 아이스크림 장수 같은 존재’라고 부른다. 도시의 역사는 오래됐으나, 남아 있는 것들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 곳. 수백 년 된 고지도와 도시정비계획서가 충돌하는 이 ‘콜라주 시티(collage city)’에서 그는 지금의 풍경을 이루는 역사의 흔적을 찾는다.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의 권기봉 SBS 기자도 마찬가지다. 이순신 동상이 서 있는 세종로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세종대왕 동상이 차례로 들었다 사라진 근대사를 떠올린다. 한국전쟁 전몰 장병 위주인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못지않은 ‘국가주의’ 과잉을 읽는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작된 ‘제야의 종’ 행사가 보신각 타종식으로 계승되고, 자주 독립을 향한 대한제국의 열망을 담았던 환구단이 호텔 장식물 신세를 면치 못하는 아이러니를 탄식한다. 그렇게 서울은 때로 깊은 상처투성이로 각인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은 현존하는 사람들의 삶의 터다. 난다 긴다 하던 기생들이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기세 좋게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던 애욕의 공간이다. 경성의 카페문화로부터 강남의 호스트바와 청계천변의 문화축제까지 아우르는 『서울의 밤문화』(생각의 나무)는 그 유쾌한 기록이다. 그리고 정도전과 이방원의 서울로부터 무뢰배·땅거지 같은 말들의 속얘기까지 왕권과 민초의 역사를 두루 껴안은 『서울은 깊다』(돌베개)에 이르면, 서울도 제 비밀을 풀어 줄 맛깔스러운 이야기꾼을 갖게 됐다는 자긍심이 생긴다.

린위탕은 말한다. “도시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인간은 짧은 순간 왔다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래서 모든 도시는 한때 그곳에 살았던 인간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생을 사는 서울인들에게 더 솔깃한 건 다음과 같은 고백이다.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의 눈에 가장 부럽고 신기하게 비치는 게 무언지 아십니까? 부러운 건, 뭐니뭐니 해도, 밤이 되면 빌딩들의 창에 켜지는 불빛 아니 그 불빛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고 신기한 건 버스칸 속에서 일 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자기 곁에 이쁜 아가씨가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중) 그때도 지금도, 이방인의 시선으로 볼 때 더 매력적인 ‘달콤한 나의 도시’ 서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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