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도둑이나 잡아요-비자금 파문이후 범죄둔감증 번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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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 정도가 뭐 그리 죄가 된다고 큰 소립니까.시간있으면 「큰 도둑」이나 잡아요.』 서울중부경찰서 조사계 K경사는 최근 황당한 일을 당했다.돈을 떼먹고 달아나 수배된 피의자의 연락처를 겨우 찾아내 전화통화를 하게 됐는데 대뜸 저쪽에서 하는 말이었다. 『당신 그렇게 나오면 쇠고랑 차게 돼요.빨리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세요.』 K경사의 자진출두 권유에 그 용의자는 『누구는 수천억원을 해먹었는데 몇백만원을 갚지 않은 것이 대수냐』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노태우(盧泰愚)씨 비자금 파문이후 일선 수사당국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사회 전반의 준법정신이 해이해지고 공권력의 권위가 추락하면서「범죄 둔감증」이 번지는 한 단면이다.
『힘없는 시민들만 법대로 한다면 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27일 밤 술먹다 친구를 때린 혐의로 서울용산경찰서에 잡혀온 崔모(23.회사원)씨는 형사에게 『이것도 죄가 되느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단속하는 경관입장에서도 말문이 막힙니다.권력있는 사람에게는즉각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 반면 교통법규 한번 어겼다고 즉석에서 스티커를 발부하는 것이 이치에 맞느냐는 반론입니다.』 28일 서울시내에서 교통단속중이던 한 순경의 얘기다.
용산경찰서 형사과 홍윤일(洪潤一)경장은 『비자금 때문인지 최근들어 피의자들이 경찰관의 심문에 잘 응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서울대 권석만(權錫萬.심리학과)교수는 이에 대해 『워낙 비자금 규모가 엄청나다보니 서민들의 박탈감이 큰 것 같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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