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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거절의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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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만 잘라야지 마음먹었다가 파마까지 하게 되고, 다이어트를 시작하니 부서 회식이랍니다. 갚지도 않으면서 담배 한 개비, 커피 한 잔 값 꿔달라는 선배는 어떻고요. 얄미워서 ‘싫어’ 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차마 내뱉지 못하니 화만 쌓입니다. 예의와 배려가 지나치다 보니 ‘아니오’‘못해요’는 ‘내 사전에 없다’가 된 거죠. 실제 week&이 1112명에게 물어보니 51%가 ‘평소 거절을 잘 못한다’고 하네요. 이젠 좀 바꿔 보면 어떨까요. 하기 싫은 일, 할 수 없는 일엔 ‘노’라고 말해 보세요. 상대가 상처받을까, 등 돌릴까 걱정이라고요? 그래서 거절에도 기술이 필요할 테지요. 여우같이 욕 안 먹고 거절하는 법, week&이 알아봤습니다.

글=이도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끈질긴 텔레마케터엔 단호히 “생각 없어요”


이론은 알아도 실전은 별개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상황을 몇 가지 설정했다. 어떻게 거절하면 가장 좋을까,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다.

왜 나만 일해야 하죠?

Q 대기업 기획실에 근무하는 A씨. 영어는 물론 일본어도 능통한 재원이다. 그러나 A씨는 피곤하다. 사무실에서 업무 중 영어 통·번역이 필요할 때마다 그를 찾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건데 말이야” “A씨가 네이티브니까”라는 식으로 부탁해 올 때마다 난감하기만 하다.

A 상사가 시킨 일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당신의 사회생활 지수를 시험해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 한 번은 흔쾌히 해 줘도 좋다. 그러나 계속될 땐 방법을 달리하자. “당장은 어렵네요. 대신 ○시간 뒤에 ○○ 정도 도와드리죠” “다해 드릴 수는 없고 ○○만 하죠”라고 정중히 이야기한다. 시키는 일이 ‘지시’가 아니라 ‘부탁’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또 “선배님이 ○○를 맡아 주시면 제가 대신 ○○를 하죠”라고 선택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거절의 방법이다. 그러나 부당한 요구라도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또 “○○가 한가하던데 시켜 보시죠”처럼 남을 팔아서도 안 된다.

소개팅 남 정리하고 싶어요

Q 소개팅에서 남자를 만난 B씨, 주선자를 생각해 한두 번 더 만나 봤지만 영 맘에 안 들어 그만 만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혼자 진도 나가는 상황. 당연히 사귀는 걸로 생각하고 계속 연락을 해 온다. 어떻게 해야 소개해 준 사람에게도 미안하지 않게 정리할까 고민이다.

A 다른 어떤 거절보다 조심스럽다. ‘당신이 싫어요’라고 말하는 방법이 가장 깔끔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도 사실. 그래서 “제가 연애할 시간이 없네요”라든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좀 독특해요”라는 표현으로 거절의 이유가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알려 준다. 주선자와 친하다면 돌려서 거절의 뜻을 밝힌다. 마지막 만남 때 “친구로 지냈으면 한다”며 간접적으로만 암시한 뒤 이후 소개시켜 준 사람에게 솔직한 의견을 피력한다.

소개팅과 달리 사랑 고백은 정리가 더 쉽지 않다. 주변의 뒷말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 “당황스럽지만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고 한 뒤 “○○씨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안하다”며 거절을 표시한다. 다른 사람을 사귀는 중이거나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보통 임자가 있다고 하면 포기하기가 쉽다. 하지만 상대방이 맘에 들지 않아서라면 굳이 거절의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게 낫다. 말 꺼내기조차 힘든 소심형이라면 모든 전화·문자 등을 끊어 버리고 ‘잠수’하는 것도 방법이다.

텔레마케터의 ‘밥’이에요

Q 소심한 성격의 C씨. 텔레마케터의 전화를 끊지 못해 고민이다. 텔레마케터의 빠르고 공손한 말투를 중간에 자르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들어주다 보니 한번 전화를 받으면 10여 분 이상을 들고 있기 십상. 어느새 필요 없는 물건을 자꾸 사게 되고 자잘한 보험에도 여러 개 가입했다.

A 가장 짧고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짜증보다는 냉정함을 유지할 것. 영업사원의 경우 ‘거절의 면역력’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래서 공손한 말투를 끊으면서 거절한다고 해도 상처받을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왜 싫은가에 대한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바쁘니 다음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면 “언제 전화할까요?”라는 답이 올 게 뻔하다. 미안하다든가 다음에 보자는 식의 여운도 남겨서는 안 된다. 계속 권유할 때는 ‘생각 없습니다’ ‘필요 없습니다’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해 말한다.

회식 피하자니 따돌림 걱정

Q 서른 중반에 결혼한 D씨. 더 나이 들기 전에 아이를 갖겠다고 마음먹고 ‘몸을 만드는’ 중이다. 그러나 하루 걸러 계속되는 회식이 문제다. “임신 준비 중이에요”라며 술잔을 거절하면 분위기를 깨뜨릴 것 같고, 마시자니 먹고 있는 한약의 본전이 생각난다.

A 부드러운 거절이 필요하다. 막연히 술을 못한다고 하기보다는 “요즘 출산율도 낮다는데 도와주세요”라는 식의 애교가 필요하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면 “저희 집은 부모님부터 못 드세요”라고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다. “두 잔만 먹으면 바로 기절합니다”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주량을 밝혀도 좋다. 분위기를 이어가려면 “제가 대신 한 잔 드리겠습니다”고 권해 보자.

회식 자체를 빠지고 싶을 땐 일이 남아 조금 늦게 가겠다고 말한다.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보통 불참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 개인적인 핑계보다는 업무 문제를 말하는 것이 상대의 이해를 구하기 쉽다.

높은 자리 있는 게 죄인가요

Q 가문의 영광이자 개천에서 용 난 E씨. 변변찮은 친인척과 달리 고위 공무원까지 올랐다. 그렇다 보니 주변의 부탁이 이만저만 아닌 상황. 일자리 알선은 물론 사업 허가까지 크고 작은 청탁이 끊임없다. ‘우리가 남인가’ 식으로 접근해 오면 늘 큰 부담이 된다.

A 별로 가깝지 않은 지인이라면 무리한 부탁임을 딱 부러지게 말한다. 문제는 가까운 지인일 경우다. 도덕적 원칙을 말하거나 냉철하게 잘라 말하는 게 썩 좋지 않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 “너 잘났다”라든가 “내가 너한테 그것밖에 안 되느냐”라는 답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로 운을 뗀 뒤 “회사가 엄격해져 이젠 그런 일 하면 잘리게 돼요”라는 식으로 상황이 불가피함을 알리자. 부탁이 합리적이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데 내가 못 하는 것이라면 적당한 사람을 소개해 주는 것도 좋다.

나는 은행이 아니에요

Q 평소 정 많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F씨. 며칠 전 친구의 부탁을 받고 고민 중이다. 새로 특허받은 제품이 곧 대박을 칠 테니 초기 사업비용을 좀 빌려 달라는 것. 여윳돈이 있지만 언제 어떻게 갚을지 몰라 꺼림칙하다. 거절하고 싶지만 친구와의 우정을 생각하면 맘이 편치 않다.

A 사업에 꼭 필요한 돈이라는 점에 공감해 준다. 적지 않은 금액이니 알아보겠다며 시간을 번다. 기한은 ‘언제까지’로 못 박고 1주일을 넘기지 않는다. 친할수록 힘든 거절은 기대가 커지지 않게 약속보다 먼저 한다. 만나기 부담스러우므로 전화로 해도 좋다. 집 담보대출, 가족의 병원비, 경조사 등 ‘내 코가 석 자’라는 식의 이유가 적절하다. 1000만원을 빌려 달라면 수십만원 정도를 주며 성의를 표시해도 좋다. 단, 돌려받을 생각은 말아야 한다.

도움말=문요한 정신과 전문의, 박수애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연구원, 이정숙 대화전문가, 최윤희 칼럼니스트,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 이명길 연애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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