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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108) 서울 노원병 한나라당 김정기 후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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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40대 후보들이 이번에 등원하면 한나라당도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노무현 정권과 당당히 겨룰 수 있습니다.”

서울 노원병에서 출마하는 김정기(44) 한나라당 후보는 “한나라당에 건전 보수 성향의 합리적인 전문가 그룹이 모였다”며 “싸움밖에 모르는 386 운동권이 주도하는 열린우리당과는 근본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저도 젊은 후보로서 정서상으로는 열린우리당이 외치는 개혁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산다고 믿습니다. 노 정권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예요. 총선 후에도 노 정권을 한나라당이 감시하고 견제해야 합니다. 다음 대통령선거가 있는 2008년엔 중도·온건·합리를 지향하는 중도우파가 주류세력을 이뤄야 합니다.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열린우리당이 중도좌파로 자리매김한다면 그 때 제대로 된 여당과 협상과 타협, 관용의 상생정치를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또 한나라당이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썼지만 이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 시절의 과거 유산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단적으로 한나라당의 선회는 이번에 개혁공천을 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당수의 지역구가 45세 전후의 젊은 후보들로 채워졌다는 것. 나머지 지역들도 대부분 50대 전후의 인사들이 포진해 한나라당이 젊어졌다고 강조했다.

“물론 5,6공의 주류가 건재하고 있는 만큼 도덕성이 확보된 당은 아닙니다. 이번 총선을 통해 주류의 교체가 이뤄질 거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유치원 수준의 노 정부에 놀아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 후보는 미국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국제변호사다. 스스로는 갈등을 봉합하는 협상 전문가로 자처했다. 한국협상법학연구소(KNI) 소장도 맡고 있다. 한국사이버대학 초대 학장으로 교육행정가로서의 경험도 쌓았다. 대학영어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거로영어’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면 고비용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국민을 소인배로 만드는 법이 아니라 제대로 된 법을 만들어 국민들이 당당하고 떳떳해지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지키지 못할 법들을 만들어 국민들을 죄인시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줄 모르는 도덕 불감증에 걸린 겁니다. 전 국민의 공범화가 이루어진 셈이죠. 그러다 보니 정치인 비리를 보고도 비난은 하지만 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쏙 들어가고 마는 거예요.”

그는 정치는 윈-윈 게임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참 선비들은 정치를 그런 방식으로 했다고 말했다. 파워 엘리트는 백성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 지역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한편 국회에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그런 아픔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후보는 지난 달 말 송파에서 노원으로 선거구를 옮겼다. 송파에서 5년 동안 표밭을 갈았지만 한나라당의 클린 벨트-전문가 전진 배치 전략에 따라 뒤늦게 전장을 바꾼 것. 노원구는 한나라당이 서울 동북부 거점을 마련하려고 하는 전략 지역이다. 이런 구상에 따라 노원병에 김정기씨, 노원갑엔 현경병씨, 노원을엔 권영진씨가 배치됐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문성을 갖춘 40대 초반의 정치신인이라는 것.

지역구인 노원구의 현안으로는 주거 환경 개선을 꼽았다. 이를 위해 노후화된 아파트와 서민 아파트들의 재건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문화시설과 공원시설이 열악해 주민들이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했다.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모범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유신정권 말기에 희생타로 옷을 벗었다. 그 후 아버지는 새로운 마음으로 농장을 시작했지만 56년 만의 강추위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아버지는 70년대에 2천만원의 빚을 졌다. 당시 시세로 아파트 세 채 값이었다. 아버지의 좌절은 어린 시절 큰 상처로 남았다.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그가 정치가의 꿈을 꾼 것은 그의 이런 정신적인 외상과 무관치 않다.

고등학교 이학년 때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상경했다. 그 겨울에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나이엔 입시학원 강사로 데뷔했다. 친구들이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할 때 그는 또래들을 가르친 셈이다. 그는 그 해 일년 동안 아파트 몇 채 값을 벌어들였다고 회고했다. 친구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그는 서울의 주요 대학에 영어 강의를 나갔다. 그들이 졸업할 나이에 그는 강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호는 거로(巨路)다. ‘거꾸로 온 길을 바로 가자’와 ‘큰 길’의 의미를 담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운 인생역정을 겪은 만큼 소외된 계층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 진 월간중앙 정치개혁포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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