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리 만나는 세계의 지성] 3. '옛 동독의 김민기' 볼프 비어만 시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 작가에게 사인을 부탁했더니, 특유의 너스레를 떨고는 짓궂은 말을 남겼다.‘유권하 특파원이 중앙일보 독자를 위해 많은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2005년 4월 15일 함부르크 알토나 볼프 비어만.’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이란 독일의 시인이 있다. 자신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기를 즐긴다. 삶 자체가 독일 통일 과정을 축약한 것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독일 통일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그가 5월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다.물론 첫 방한이다. 독일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본지 유권하 베를린 특파원이 비어만을 만났다. 예술가다운 재치있고 뜻 깊은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69세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혈기가 넘쳤다. 마치 자신의 이름(Wolf)처럼 늑대가 울부짖듯 말을 쏟아냈다. 때론 무대위의 배우처럼 큰 제스처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볼프 비어만(69). 그는 건재했다. 콧수염과 기타를 둘러멘 모습도 그대로였다. 1960~70년대 비밀경찰(슈타지)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신랄한 어투로 동독정권을 질타하던 매서움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유 시인답게 굵은 저음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다. 잦은 연주 여행으로 바쁜 그를 함부르크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5월에 한국을 방문한다고 들었다.

"강연도 하고, 노래도 부를 예정이다."

-한국민과 어떤 얘기를 나눌 작정인가.

"통일에 대한 한국민의 불안에 관해 말할 것이다. 한국민은 통일을 갈망하면서도 걱정하고 있다. 그것에 관해 얘기하려고 한국에 간다."

-한반도 통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베를린 장벽이나 동독이 내 생애보다 더 오래 지탱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내 예측은 틀렸다. 그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통일을 예견하지 못했나.

"장벽붕괴 이후 통일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총살이 무서워 장벽에 접근 못했던 동독 주민들은 위험이 사라지자 장벽을 뛰어 넘었다. 배고픈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한국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통일 상황과 관련해 한국이 독일과 다른 점은.

"남북한의 생활 수준은 통일 당시 동서독보다 적어도 100배 이상 차이가 날 것이다. 독일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그래서 독일의 경험이 한국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독일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상황과 아주 다르다는 점이다."

-힘들더라도 역시 통일은 가치있는 과업이라고 생각하는가.

"독일의 내적 통일은 아직 10% 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의 통일은 독일보다 더 어렵고, 더 많은 돈이 들고, 고약하고 짜증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통일을 과감히 시도하라고 권하고 싶다. 용기를 가져야 한다. 스스로 체험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이 내가 한국민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이다."

-독일 통일 후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동독 주민의 의식이 성숙치 못하다는 점이다. 통일 전 동독 주민이 입은 큰 피해는 서독에 비해 생활 수준이 낙후됐다는 점이 아니다. 사람의 의식이 망가졌다는 얘기다. 동독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이 겪는 상처는 바로 의식의 미성숙성이다. 동독 주민에 있어 행운이자 불행은 잘 사는 형제국가 서독을 가졌다는 점이다. 부유한 한국은 북한에게 기회도 되지만 큰 위험이다."

-당신의 유년시절 얘기를 해 보자. 서독 출신인데 왜 동독으로 이주했나.

"17세 때 동독으로 넘어갔다. 공산주의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인 아버지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현명한 여성이었다. 어머니도 나와 함께 동독 이주를 희망했지만 동독 정권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독에서 계급투쟁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이유에서였다. 어머니는 94년 90세로 돌아가셨다."

-스스로 동독을 택했으면서 반체제 인사가 된 이유는.

"관광객 자격으로 동독을 방문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열렬한 환영을 받고 난 후 더욱 멍청한 공산주의 추종자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동독체제 하에 살았기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비판의 강도는 높아 갔다. 동독 정권은 65년 내가 하던 일을 못하도록 직업금지령을 내렸다. 6명의 기관원이 따라 다니면서 사생활을 낱낱이 감시했다. 결국 76년 동독 시민권을 빼앗겼고 서독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최근 한.중.일은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당신의 견해는.

"역사교과서 왜곡과 일본의 과거사 부정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과거의 범죄를 부인하는 행위 자체가 범죄다. 일본의 현 세대가 저지르는 가장 큰 범죄는 과거 세대의 범죄 사실을 덮고 역사를 속이려는 것이다. 한국민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맞서 싸워야 한다. 전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진실을 분명하게 얘기해야 한다."

함부르크=유권하 특파원

◆ 볼프 비어만은 …

1936년 함부르크 생. 독일 분단시절 동독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7세 때인 53년 스스로 공산정권 동독으로 이주한 뒤 55년부터 훔볼트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시를 썼다. 65년 첫 시집 '철사줄 하프'를 발표해 주목받았다. 이후 악보가 딸린 시집 7권을 내면서 동독의 대표 작가로 떠올랐다. 작품 대부분이 동독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당국으로부터 활동 금지 조치를 받았고, 급기야 동독 당국은 76년 비어만의 서독 방문을 구실로 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당시 동서독 예술가들은 이 사건을 강력 항의했으며, 그는 추방당한 반체제 예술가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