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화재 정책이 있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옛 현인(賢人)들은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두가지 방법을 택했다.구리(銅)거울을 들여다보며 의관을 바로잡고,역사를 거울로 삼아 세상 일을 바로잡았다.
요즘엔 구리보다 더 잘보이는 유리거울이 얼마든지 있으니 의관은 바로하기 쉽지만 역사의 거울이라 할 수 있는 문화재는 급속하게 파괴되고 있어 뜻있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한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그 민족의 문화적 개성에 있다.우리 민족은 언어.풍습.음식.주거방식이 동양의 어느나라와도 다른 특수성을 유지해왔다.이런 요소들이 민족국가를 지켜온 원인이자 원동력이다.이런 원동력을 계속 유지,발전시키는 일이 바로 문화정책이다. 우리의 문화정책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역사의 거울이 가득 묻혀있는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경주시내를통과하는 고속전철을 계획하고 있고,수만점의 역사 교과서인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을 새로 짓기도 전에 철거 부터 서두르고 있다.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모두 시대병 중 하나인「빨리 빨리병」때문이라고 생각된다.잠시만 생각하고 결정하면 될일을 우리는 너무 서둘러 결정하는 버릇이 있다.
고속전철 노선을 계획한 건설교통부는 설계를 빨리 완성하기 위해 문화재 담당부서와 의논하는 것을 생략했다.민족정기의 고양(高揚)이라는 인기있는 깃발을 내세운 정부는 이사할 집도 짓지 않은채 옛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시작했다.발 빠른 정책결정인 것 같지만 바늘 허리매어 쓸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수순(手順)이다. 문화의식의 부재현상은 도처에 보인다.고도 경제성장의 결과로 국토는 빠른 속도로 개발되고 있다.말을 바꾸면 국토는 빠른 속도로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농촌의 도시화,농업환경의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다.숨가쁜 변화속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채 잃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마을주민의 정신적 지주인 수백년된 당나무가 뿌리뽑히며,국보 1호인 서울 남대문은 차도에 갇힌 섬이 되고 말았다.민족문화가 이렇게 푸대접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문화정책상 실수들은 이제 끝나야 한다.지금까지 경제성장만을 지상과제로 살아온 현대 한국인들을 한국세대라 부른다면 한국세대들의 마지막 할 일은 국민소득을 2만달러로 올리기 위한 노력이 아니다.차라리 빨리빨리병 증상에서 벗어나려 는 노력이 요구된다.건국 50년은 국가 발전단계로 보면 사춘기(思春期)에지나지 않는다.한국세대는 문화사춘기를 경험하며 특유의 순발력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수많은 사춘기적 시행착오도 저질렀다.
자,이제 정신차릴 때가 왔다.속도보다 안전을 생각해야 하고 남들이 깔보는 졸부가 되기보다 어렵더라도 종가(宗家)를 지키는,체통이 존경받는 풍토가 형성돼야 한다.우리의 민족문화를 세계인들이 부러워하게 잘 가꾸고 키워 다음 세기에도 한국이 세계속에서 대접받는 나라가 돼야 한다.그것은 경제발전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문화의 깃발을 내세운 새로운 건국정신이 필요하다.
***문화전문가 키워야 그러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문화전문가가 필요하다.지역별 문화를 파악할 전문 공무원이 전국 요소에 배치돼야 한다.한국문화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책을결정해서는 안된다.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국가와 민족의 체통을 지켜나갈 문화인을 육성해야 한다.
경주땅에 누워계신 신라왕들이 한국세대들의 분별없는 문화정책을보시면서 가끔 역사의 거울을 내보이실 것이다.그 거울을 알아보고 새로 찾는 안목이 있는 문화파수꾼이 육성돼야 한다.천천히….〈漢陽大 박물관장.한국고고학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