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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일상적 소재로 풀어본 서울의 어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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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은 깊다
전우용 지음
돌베개
392쪽, 1만8000원

고궁에 가 본 사람이라면 한번 쯤 느껴봤을 지 모른다. 나름대로 꼼꼼하게 들여다보려고 애를 써도 100~300년 전 역사는 잘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디 고궁 뿐이랴. 기자는 독립문을 매일 지나치며 출퇴근을 하고 남대문 인근을 걸어다니지만 솔직히 서울의 ‘과거’를 상상해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이 책은 그렇게 아련한 역사 이야기를 손에 확 잡힐 듯이 앞으로 끌어다준다. 여기에는 저자의 공이 크다.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서울학연구소(서울시립대 부설)에서 10년 이상 서울사 관련 연구를 했다.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그가 도시계획학·도시공학·건축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토론해 얻은 성과물이다.

하지만 “가급적 이 책을 그동안 우리 역사학이 다루지 않았던 내용으로 채우고 싶었다”는 저자는 좀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뒷골목’ ‘똥물, 똥개’ ‘물장수’ 등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로 서울을 탐구하는 식이다. 덕분에 이 책에는 대한제국 시기 땔감용 잡목을 싣고 독립문 앞 황톳길을 지나던 상인의 삶이, 남대문 앞 길을 자유롭게 활보하던 개들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숭례문을 보자. 책을 펼치니 남대문 옆으로 전차가 다니고, 그 앞으로 나무를 잔뜩 실은 소 달구지가 보인다(185쪽). ‘종로, 전차’라는 제목의 장에서 그는 전차와 함께 변화한 종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차의 등장으로 “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성별·연령별 격리의 관념이 약화됐으며, 무차별적인 ‘대중’이 가시적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차와 달구지의 충돌사고(182쪽 사진)에선 ‘근대적 속도감’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100년 전 서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섭쇼’라는 장도 흥미롭다. 이 말에서 18~19세기 존비법(상대 높임말)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세태를 볼 수 있단다. ‘하시오’와 ‘하십시오’를 얼버무린 존대말인 ‘합쇼’체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서울이 ‘익명성의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쉬운 말로 꼼꼼한 설명을 곁들인 풍부한 사진 자료다. 종로, 명동, 독립문, 남대문, 서소문, 청계천의 옛 풍경은 얕은 상상력으로는 채울 수 없던 역사감을 살려준다. 자칫 지루하고 딱딱한 얘기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쉽게 풀어간 저자의 내공이 고맙다. 서울 구석구석의 옛 얘기에 빠져 책장을 넘기다보니 4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이 오히려 아쉽게 느껴졌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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