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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재료로 만들어요” 농가 맛집 / 못밥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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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서지마을 조진사댁 맏며느리 최영간씨가 1971년 결혼 반년차 새색시 시절에 처음 지어 나르던 못밥의 기억입니다. 지금은 단어조차 생소한 못밥. 모내기하는 날 일꾼들을 위해 차리는 밥상입니다. 광주리에 이고 가 논두렁에 펼쳐놓고 먹던 들밥이기도 하고요.

“일꾼 앞에 밥 한 두가리, 미역국 한 두가리, 떡갈나무 잎에 담은 찐 두부, 제철을 만난 머위 등 온갖 나물과 해초를 내놓지요. 일꾼들은 두가리 하나에 밥과 찬을 모아 약고추장으로 썩썩 비비죠. 그러곤 ‘한 가마 싼다, 두 가마 싼다’고 말해요. 곰취를 손바닥에 펴놓고 비빈 밥을 올려 쌈을 싼다는 뜻이에요.”

최씨의 기억 속 못밥엔 제철 농수산물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수저를 든 한 일꾼이 뭔가 편치 않은 눈치였어요. 옆에 앉은 코흘리개 아들과 만삭인 아내의 입에 밥이 가득한 데도 말이에요. 거동을 못해 집에 남은 어머니 때문이었어요.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는 부랴부랴 밥과 반찬을 챙겨 일꾼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제야 새색시 최씨는 시어머니가 대중없이 퍼내던 쌀의 의미를 알았답니다. 못밥을 차릴 땐 밥이든 반찬이든 평소보다 넉넉하게 준비합니다. 일꾼의 식구들은 물론 동네 어르신들까지 대접하는 게 우리의 아름다운 음식문화입니다.

“못밥엔 삶은 팥을 뿌려요. 팥은 액운과 재앙을 없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어요. 하루종일 머리 숙이고 일하는 일꾼들을 배려한 것이기도 하죠. 팥은 피돌기를 원활하게 해주고 부종을 막아주고 이뇨효과까지 뛰어나거든요.”

최씨네 못밥엔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농사에 생활의 뿌리를 둔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에 대한 마음입니다. 실제 최씨는 서지마을 창녕 조씨의 9대 종손 며느리입니다. 시어머니 김쌍기(86)씨로부터 집안의 음식과 손맛을 배웠습니다.

10년 전부터 최씨는 모내기철이 아닌데도 매일 못밥을 차립니다. 농막을 고쳐 지어 ‘서지초가뜰’(033-646-4430)이란 음식점 간판을 내걸고부터입니다. 돈벌이 목적은 아니었답니다. 시어머니는 물론 종가 어른들의 반대로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답니다. 그러나 “강릉을 대표하는 대물림 상차림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끈질긴 권유에 결국 집안 어른들도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1만원짜리 못밥 상차림은 논두렁 멍석에서 실내의 밥상으로 옮겨앉았습니다. 지금은 원래 못밥보다 반찬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다른 지역 밥상에는 없는 강릉 특산물로 만든 메뉴가 눈에 띕니다. 문어초회·쇠미역튀각·개두릅·쑥튀김 등이 그것입니다. 쇠미역튀각의 바삭거림은 은박지처럼 얇고 금박지처럼 귀하네요. 개두릅엔 강원도 산속의 깊은 맛이 담겨 있습니다. 미역국이 색다릅니다. 된장 푼 국물에 콩나물까지 들어 있어 매끄럽고 구수합니다. 지난해 말린 가지 오가리·고사리·무청 시래기 등 묵은 나물엔 갈무리한 정성이 가득하고, 곰삭은 고추장아찌는 매운 맛이 순해 더 반갑습니다. 대구포를 잘게 썰어 삭힌 포식해는 더운 밥과 찰떡궁합입니다. 밥도둑이 따로 없더군요. 못밥을 한술 한술 뜨다 보니 두가리 바닥이 금방 드러납니다. 밥을 먹으며 땅의 존엄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전국 각지의 이런 음식점을 골라 농가 맛집(표 참조)으로 지정하고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모두 향토 작물로 음식을 만든다고 합니다. 충북 충주의 ‘사과 꽃마을’은 사과를 활용한 음식이, 충남 태안의 ‘곰섬나루’는 염전의 함초 음식이 주 메뉴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로컬 푸드(local-food) 운동의 뿌리가 우리나라에 있었네요. 자기 땅에서 키운 농산물을 먹자는 것이 이 운동이죠.

미국 뉴욕에선 수확철인 9월만이라도 100마일(161㎞) 이내에서 나는 것만 먹자는 ‘100마일 다이어트 운동’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보존비가 덜 들어가고 농약이 덜 뿌려진 농산물을 먹을 수 있다는 거죠. 수확물을 나르는 데 들어가는 화석연료도 줄일 수 있어 환경보호에도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고요.

우리의 ‘로컬 푸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하룻밤 자면서 농촌생활도 경험할 수 있거든요.

농진청 자원식품과 김은미 과장은 “농가 맛집은 도시인들의 향수를 풀어주고 농촌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라 해마다 계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릉 글·사진=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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