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아쟁점과흐름>20.가치론 논쟁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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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휴지기(休止期)라 할까.80년대와 달리 90년대 이후 학문적쟁점들이 소멸함과 아울러 학계에서 어떤 주제를 두고 치열하게 논전을 벌이는 경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물론 이론적 논쟁이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하지만 대부분 서로 반대되는 주장들이일방적으로 개진돼 일정한 논점을 형성하는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인식공격에 가까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있는 정치경제학계의 「가치론」논쟁은 그나마 중요한 이론적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상품의 가치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를 둘러싸고 진행된 이 논쟁을 촉발하게 된 계기는 우리 나라 정치경제학에서 권위자로 인정받는 경제평론가 정운영(서울대 강사)박사가 93년에 펴낸 『노동가치이론 연구』(까치)였다.국내 경제학계에서 가 치론에 대한연구가 빈약한 가운데 이 이론서는 가치론에 대한 본격 연구서로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가치론을 둘러싼 경제학계의 논의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박사의 책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한것은 전남대 이채언(경제학과)교수.이교수가 주간지 『뉴스메이커』(93년7월18일자)에 약 10장 가량의 원고를 기고하면서 자세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한마디로 실패 작」「습작」「서울대 경제학과 출신들의 독백」등 인식공격에 가까운 비판을 가함으로써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 비판에 대해 이교수의 서울대 경제학과 선배인 정박사가 부정기잡지 『이론』 94년 봄호에 이교수 비판의 10배에 해당되는 분량의 반론 「변명을 위한 변명」을 실었고,이교수가 다시 『경제와 사회』 94년 겨울호에 재반론을 실음으로 써 사회과학계에서 회자되었던 논쟁의 첫 라운드가 마감하게 된다.
이 논쟁이 제기한 문제 중 합리적 핵심을 추출해낼 수는 있다.인간 노동의 결과인 상품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형태의 유용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가치라는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이 가치의 실체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 인가 하는 것이 이들 사이의 논쟁의 핵심.이교수는 노동투하설을 주장하는 반면 정박사는 가치가 시장을 통해 실현되는 과정에 개입될 수밖에 없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는 추상노동학파의 입장을 가진 것.
정치경제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 논쟁에서 가치를 바라보는 양자의 철학적.방법론적 차이는 명백하게드러나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金蒼浩〈本社전문기자.哲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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