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갇힌 아이들] 2. '개천의 용' 꿈도 못꾼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 검정 비닐 보따리를 들고 나서는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서울 성동구의 한 공부방을 나서는 아이(7). 상하 줄무늬 옷을 입은 아이의 어깨엔 낡고 큰 가방이 힘겹게 걸려 있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비관적인 생각은 안 해요. 학교가 너무 싫었거든요. 학교에서도 (내가) 그만두니까 좋아했을걸요."(고1 중퇴자), "부모님이 내 성적표를 확인한 기억이 없어요."(실업고 졸업자), "꿈요? 어렸을 때 혼자 생각한 건 있어요. 축구선수.요리사…. 하지만 아무도 꿈을 물어보지 않았어요."(중1 중퇴자)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학 진학을 포기했거나 중.고교를 중퇴한 빈곤층 남녀 10명을 면접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답변들이다. 본지 취재팀과 함께 면접 사례를 분석한 인권위 연구팀은 평가서에 이렇게 적었다. "과거와 달리 최근 빈곤층 아이들은 단순히 생계 곤란만으로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다. 가정.학교.사회가 어릴 적부터 방임하면서 스스로 '학교 간다고 별 수 있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요즘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습니다." 인권위 김선민 과장의 말이다. 100만명의 빈곤 아동 중 상당수가 실직한 아빠, 이혼한 엄마, 사교육에 눌린 학교 등의 관심에서 밀려나면서 일찌감치'용'이 되길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극빈층이 주로 입주해 사는 관할 임대아파트 단지(1800여가구)에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은 1년에 한명 나올까말까 합니다. 많은 아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서울 성산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 이화진(32.여)씨의 말이다.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은 가난에 갇힌 아이들과 중상층 아이들의 '질적' 격차를 더욱 벌린다. 취재팀의 의뢰로 한국노동연구원이 노동패널(전국 5000가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소득 하위계층 자녀들은 2003학년도 수능시험에서 13.5%가량이 하위권 성적을 받은 반면 상위권 성적을 받은 자녀는 16.5%였다. 소득 상위계층 자녀의 경우 하위권이 2.5%에 불과한 반면 상위권은 29.8%에 달했다.

하위권 수능 성적을 받은 하위계층 자녀들의 비율이 상위계층의 다섯배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취재팀이 최근 부스러기사랑나눔회와 공동으로 빈곤지역 공부방에 다니는 초등학생 28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학원에 다닌다고 응답한 학생은 21.2%에 불과했다. 지난해 한국교육개발원은 "전국 초등학생 중 83%가 학원에 다닌다"고 발표한 바 있다.

빈곤층 아동들은 좌절과 절망, 그리고 수치심과 도덕적 마비 증세까지 겪게 되면서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파국을 곧잘 맞이하게 된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서울.부산의 저소득 지역 초.중생 313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8%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숙명여대 아동복지학과 이재연 교수는 "중.상류층 자녀들은 점점 더 비싼 사교육을 받고 있는 반면 빈곤층의 교육 여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며 "빈곤의 대물림과 고착화를 막기 위해서는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