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신 강령을 부추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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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19면

컴퓨터가 아무리 널리 쓰여도 손으로 쓰는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효율적인 비즈니스 메모법을 알리는 책도 많다. 색색의 펜이나 스티커 등으로 다이어리 꾸미는 법을 이야기하는 인터넷 카페도 있고 책도 나왔다. 이런 흐름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실은 나도 저 두 가지를 다 하고 있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메모장이 있고 약속과 일 계획을 적는 작은 주간 수첩도 있다.

조동섭의 그린 라이프

젊은 유행을 따르겠노라고 이것저것 붙이고 그리며 그날의 일을 쓰는 일기장도 있다. 어쨌거나 나도 메모하는 습관을 갖는 게 좋으며 필요하다고 늘 주변에 떠든다. 하긴 방금 들은 이야기도 돌아서면 까맣게 까먹으니 그 자리에서 적지 않았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그런 나도 펜 욕심은 없었다. 잘 굴러가는 볼펜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흔히 쓰는 볼펜은 대개 일회용이다. 전에는 사람들이 가장 흔한 그 ‘153’ 볼펜도 심을 갈아 쓰곤 했는데 요즘에는 그 심을 구하는 게 더 힘들다. 다 쓰면 아예 버릴 수밖에 없는 볼펜이 더 많다.

두세 해 전 어느 날 다 쓴 볼펜을 버리려고 보니 재활용 수거함 중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난감했다. 이게 다 버려지면 엄청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을 돌리니 책상 위에 놓아둔 이 빠진 머그잔에 그런 볼펜들이 가득 꽂혀 있지 않나. 통째로 버릴 수밖에 없는 펜은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기왕이면 값이 좀 나가더라도 멋진 펜을 찾겠노라 나섰다.

“환경을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비싼 펜을 갖고 싶은 거지?”라는 친구의 핀잔에 부득부득 아니라고 우기면서(뭐가 사실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시길). 그렇게 해서 내 기준에서는 거금을 주고 장만한 볼펜을 심 한 번 못 갈고 잃어버렸다. 술 마시고 물건을 잃어버리는 게 어찌나 다반사인지 속이 쓰리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일이만원 정도에 심도 갈 수 있고 멋스러운 펜을 찾았고, 그런 볼펜과 만년필을 장만해 해를 넘겨 잘 쓰고 있다.

펜을 찾아다니면서 보니 호사스러운 펜의 세계도 나름대로 거대한 왕국이다. 겉모양뿐 아니라 안의 메커니즘과 만년필이라면 그 펜촉까지 장인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 남에게 보이고 싶어서든 자기 만족이든 값비싼 펜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면 과감히 지르라. 아내가 핀잔을 주면 이게 다 환경을 위한 일이라고 떳떳하게 큰소리치면 된다. “미국에서 1년에 소비되는 볼펜이 50억 자루가 넘고, 대부분 일회용이니 해마다 버려지는 볼펜 플라스틱만도 770t이나 된다”는 말도 덧붙이면 된다.


글쓴이 조동섭씨는 번역과 출판 기획을 하는 한편 문화평론가로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 친환경주의자로서의 싱글남 라이프스타일 기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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