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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과학칼럼

‘FTA 농촌’ 구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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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앞두고 농촌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값싼 외국 농산물이 밀려 들어오면서 우리 농촌의 설 자리가 더욱 좁아진다고 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있는 법, 생각을 바꾸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의 과학기술자로서 희망을 찾아보고 싶다.

우선 희망적인 것은 우리 국민들이 국산을 선호하고, 우리 농촌은 입맛에 맞는 고급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짜의 범람이다. 따라서 고급품을 보호하는 데에서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즉, 창작물의 ‘지적재산권’처럼 ‘농산물 재산권’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나 화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호화된 밑그림을 넣어둔다. 이 밑그림이 나중에 정품인지 가짜인지 구별해 준다. 농산물에도 바로 이런 원리를 적용해 보자.

첫째 방안은 고급 농산품 ‘포장’을 생산자들이 직접 하는 것이다. 물론, 공산품처럼 이 포장이 뜯어지면 정품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제품의 포장단위도 소비자가 구입하는 작은 단위로 포장한다. 예를 들어 명품 쌀과 쇠고기는 1㎏, 5㎏, 10㎏씩 포장한다. 특히 한우는 현지에서 부위별로 등급을 매겨 품질을 관리한다. 생선도 한두 마리씩 진공포장해 냉장차에 싣는다. 유기농 채소도 소량 고급포장으로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게 한다. 물론 원가가 올라가지만 브랜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화장품이나 과자 등의 포장을 생각해 보면 농산물 포장에는 투자가 없었다. 채소·고기·생선을 소량 포장해도 신선도를 유지하며 유통시킬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포장기술 개발과 포장공장 건설 등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둘째 방법은 농산물 포장에 ‘바코드’를 부착하는 것이다. 바코드는 현재 거의 모든 공산품에 부착되어 있는 암호번호다. 이 번호를 알게 되면 제품의 이름과 가격을 알기 때문에 수퍼마켓 계산대에서 이 바코드만 읽어 계산한다. 바로 이 바코드를 농산물 포장에 붙인다. 만약에 유통단계에서 한글 상표를 변조해도 바코드 암호는 바꿀 수 없다. 계산대의 스크린에 이 바코드 정보가 뜨게 해 소비자가 보게 한다. 바코드 인쇄를 위한 식용 잉크가 개발되면 농산물 위에 직접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방법은 바코드 대신에 ‘전자태그(RFID)’를 부착하는 방법이다. 이는 교통카드 원리와 비슷하다. 교통카드처럼 무선주파수로 칩 속의 정보를 읽게 만든 꼬리표가 RFID다. 농산물 정보가 담긴 RFID를 포장에 붙인다. RFID는 리더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어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물건 앞을 지나기만 해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또한 바코드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우리의 숙제는 값싸고 작은 RFID를 개발하는 것이다. 먹어도 되는 RFID를 개발하면 농산물 위에 직접 붙일 수 있다.

넷째는 농산물의 DNA를 분석해 ‘유전자 특성’을 알아내는 것이다. 농산물은 품종에 따라서 DNA 서열이 다르다. DNA 특성을 쉽게 읽을 수 있다면 농산물 상표를 변조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현재의 ‘DNA 서열분석기’는 분석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싸다. 그러나 노력하면 빠르고 값싸게 만들 수 있다. 만약 저울에 DNA 서열분석기가 붙어 있다면, 쇠고기를 올려놓으면 무게는 물론 이 고기의 정보도 함께 표시된다. 수퍼마켓의 계산대에 설치해 소비자가 볼 수 있게 한다.

외국 농산물 홍수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인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다. 정부는 수조원의 농촌 지원금을 풀 것이라 한다. 이번 기회에 기술을 개발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면 농촌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름이 깊어 가는 농촌을 돕는 일에 과학기술자의 몫이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이광형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미래산업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