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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새겨서 듣고 삭여서 듣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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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퇴임한 정부 산하 기관장 K씨와 얼마 전 저녁식사를 했다. 그는 새 정부의 종용에 따라 임기를 한참 남겨두고 사표를 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난 날 사표가 수리됐다. 다시 학문의 길로 돌아갈 처지여서인지 큰 미련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전공분야와 밀접한 기관이어서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K씨는 짧은 공직생활에서 터득한 기관장의 덕목을 “부하들에게 정확하고 일관된 시그널(신호)을 보내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관료조직은 군대 다음으로 상명하복을 중시하고 윗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회다. “비서실에서 ‘직원들과 회식이 있는데 장소를 어디로 할까요’라고 묻더라. 별생각 없이 ‘난 오늘 자장면은 싫은데’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회식할 때 중국음식점은 아예 후보로 올리지조차 않더라”고 그는 말했다. “정확하고 일관된 시그널을 보내되, 너무 세세해도 문제고 너무 추상적이어도 문제인 것 같다”고 K씨는 말했다.

정확한 시그널을 발신하는 능력이 리더십의 핵심이라면, 시그널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능력은 팔로어십(followership·피지도자의 자질)의 핵심이다. 두 능력이 조화를 이뤄야 관료조직이 살고, 기업이 살고, 나라가 흥한다. 손발 없는 리더십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따라서 팔로어십은 리더십 이상으로 중요하다. 오랫동안 을(乙) 입장에서 살아온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비서관회의에서 VIP 모시는 ‘비법’을 털어놓았다. 대기업 오너인 정주영 회장 밑에서 20년 가까이 CEO를 지낼 수 있게 한 노하우다. “정 회장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는 조용하게 찾아가 바로잡도록 건의했다. 정 회장이 판단을 바꾸면 ‘어! 회장님이 판단을 바꾸셨네’라며 모른 체했다. 정 회장이 주도적으로 잘못을 수정하는 모양새를 만들었다.”<본지 4월 28일자 6면>

공직사회에도 이 대통령 못지않은 ‘팔로어십의 달인’이 많다. 김동태 전 농림수산부 장관은 농수산부 차관 시절이던 1998년 가을, 해외에 출장 간 김성훈 장관을 대신해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마침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남부지방 과수 농가가 큰 피해를 당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낙과(落果) 피해 예방책을 소개하며 농수산부를 질책했다. 부내 최고참으로 ‘농정의 산증인’으로 불리던 김 차관이 예방책을 모를 리 없었지만 해명하지 않고 질책을 감수했다. 동석했던 전직 장관은 지금도 “30년 공직 내공이 정말 대단하더라”고 회고한다. 극비리에 금융실명제 준비가 한창이던 93년 여름, 김영삼 대통령이 추경석 국세청장(후에 건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했다. “국세청 직원 두 명이 필요하다니 이경식 부총리(경제기획원 장관)와 의논하고, 절대 보안을 지키세요.” 이 부총리가 지목한 직원 두 명이 출장 인사차 왔지만 추 청장은 ‘본능적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오라”고만 당부했다. 공연히 궁금해하다간 화만 부를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김동태 전 장관이 밝힌 팔로어십의 비결은 이 대통령의 그것과 똑같다. “윗분의 기를 꺾지 말고 지시를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라. 그러나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둘만 있을 때 조용히 건의해 바로잡아라”는 것이다. 추 전 장관의 지론도 비슷하다. 두 사람 다 관료로서 장수했다.

안 그래도 기가 센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고의 갑(甲)이 되어 팔로어십 아닌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비서진과 관료들이 비상한 팔로어십을 보여야 할 때인데 벌써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대통령의 특징은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지시한다는 점이다. 그걸 자구(字句)대로만 받아들여 전봇대만 뽑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뒤지고 다니고, 축사의 비상구 표지판만 부수고 다닌다면 입에 든 것을 소화하지 못하고 설사로 내보내는 꼴이다. 새겨듣고 삭여서 들어야 한다. 각자의 삼투막(渗透膜)을 작동시켜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잘 돌아가고 국민이 편해진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