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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투병 아내 위한 네 가지 인생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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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최근 몇 년간 서강대 손병두 총장은 뉴스메이커였다. 일과 가족사 모두. 지난 2005년 전경련 부회장 출신인 그는 재계 출신으로 서강대 총장에 임명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40여 년 경제인 생활을 하다 교육 행정가로 변신한 그에겐 그 삶의 선택 이상으로, 첫 비 신부 출신 총장, 무보수 재직 등으로 화제를 모았다. 당시 둘째 아들 결혼 축의금을 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부한 것도 이슈였다.

가족사와 관련해서는 시각 장애인 손녀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손 총장이 쓴 한 장애인 잡지 기고문을 통해 알려졌다. 축복 속에 태어난 손녀가 시각 장애였고, 손 총장을 비롯한 가족들은 절망을 딛고 아이의 눈이 돼주기 위해 애정을 쏟고 있으며, 손녀로 인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졌다는 훈훈한 스토리. 현재 손녀는 가족과 사회의 따뜻한 배려 속에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 세상과 더 가깝게 어울리는 중이다.

최근 손 총장과 관련, 또 하나의 감동 뉴스가 전해졌다. 새 정부의 총리직 후보 1순위로 유력했으나, 폐암 투병 중인 아내의 간병을 위해 고사했다는 것. 출세, 즉 한 가장의 성공 스토리로 보면 막바지 정점을 찍을 수 있던 그 순간, 일 대신 가족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것이다. 꾸준한 뉴스를 만들어 낸 손 총장의 인생사는, 그렇게 사람 냄새가 나는, 또 남다른 부부애를 알리는 자서전이 되고 있다. 봄볕이 유난하던 3월 초 오후, 서강대 총장실에서 그와 마주했다.

“내 머리 스타일, 염색은
아내의 작품입니다”

먼저 손병두 총장과 관련한 뉴스에 실린 인물 사진을 보면서 그의 머리 스타일에 눈길이 갔다. 이마 위 가운데 쪽만 백발인 나름대로 특이한 스타일. 여담 삼아, 머리 모양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앞머리 쪽이 하얗게 세는 타입이에요(웃음). 전체를 염색할까 했는데, 집사람이 그러면 너무 젊어 보일 수 있다고 해서, 옆 부분만 살짝 염색한 겁니다.”

인터뷰 시작부터, 손 총장은 아내의 자리가 너무 가깝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중이었다.

“아내가 매일 아침 드라이를 해줍니다. 내 머릿발이 기가 센 말총머리라서 아침에 정성 들여 정돈을 하지 않으면 난감한 모양이 되거든요(웃음). 마음은 순해지는 이 나이에도 머리는 여전히 뻗침 형태네요(웃음). 옛날 드라이기가 없을 때는 아내가 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궈 퍼머넌트하듯이 해줬지요. 아내는 남편 머리가 지저분한 걸 싫어해서 꼭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편을 자기 작품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허허.”

손병두 총장 부부의 사연을 전하기 앞서, 기자는 어쩌면 가장 나중 물어도 좋을 질문 하나를 미리 던지기로 했다. 훗날 자서전이 나온다면, ‘성공 스토리’가 될 것 같은지, 아니라면 어떤 내용이 담기길 바라느냐는 질문. 아내의 옆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고관직의 나랏일을 마다한 남편은 이런 대답을 내놨다.

“한 기자가 마더 테레사 수녀에게 ‘어떻게 그렇게 성공적인 삶을 살아 왔습니까’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수녀님은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성공보다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는 말을 했어요. 나도 같은 대답을 할 뿐이에요. ‘살면서 어려움은 늘 있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거기 신앙의 힘이 도움이 됐다’고요.”

성공보다는 삶의 과정에 무게를 둔다는 대답. 이제는 일보다 사람에게 더 고맙다는 설명이다. 손 총장은 “혼자가 아닌 가족과 신앙이 있기에 희망을 갖는다”며 잔잔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일 중심이 아닌 가족 지향이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 변화의 이유 안에 아내(박경자씨)의 투병기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지난 2006년 11월, 아내는 정기 검진을 받던 중 폐암이라는 뜻밖의 진단을 받았다.

“평소 집사람이 건강했어요. 일 년에 한 번씩 정기 검진을 받았고, 서울 도곡동 집 근처 양재천에서 산책을 하고, 대모산에 오르면 나보다 먼저 올랐어요. 건강을 걱정한 적은 드물었죠. 집사람이 동네 아주머니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 나이면 조금 더 면밀한 진단을 받아 보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나 봐요. 그렇게 검진을 받았는데, 뜻밖에 폐암 진단이 나온 거죠.”

건강 예방 차원에서 시작된 검사는 생각지 못한 진단 결과를 전했다. 폐 부분에서 이상 소견이 나와 조직 검사를 받았고, 아홉 부분 정도가 암 조직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

“당시 업무(서울-대만 클럽의 대만 지부 설립 문제)상 출장을 가야 했어요. 아내의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했을 때죠. 나랏일로 가야 하는데 걱정은 되고, 그런데 아내가 담담하게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출장을 갔고, 수시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사람 상태를 체크했죠. 그런데 다음 날 수술 일정이 잡혔다는 거예요. 모든 출장 일정을 취소하고 다음 날 첫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왔어요. 돌이켜 보면, 아내에게 ‘큰 죄’를 지은 셈이죠.”

수술은 5시간 정도 걸렸다. 시침이 다섯 번 도는 그 시간이 남편에게는 어떤 세월로 기억될 것인가. 수술실 밖에 머물던 손 총장은 그 먹먹한 시간 동안 할 일은 오직 ‘진심어린 기도’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살면서 난관이 있었죠. 학창 시절엔 고학을 했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사십대에 명예퇴직을 당하고 무작정 미국 유학길에 혼자 오르면서 어쩔 수 없이 ‘나쁜 가장’이 된 적이 있고요. 그런데 아내가 수술을 받는 동안은 정말 반쪽이 떠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애가 탈 수가 없더군요.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을 쏟으며 기도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암이 무서운 건, 발견과 치료 과정의 고통이 크다는 데 있지만 환자와 가족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심리적인 충격을 간과할 수 없다. 투병 환자의 힘겨운 사투, 그리고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고통. 손 총장은 ‘혹시 반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상실감의 가능성이 무엇보다 어깨를 짓눌렀다고 했다.

건강하던 아내가 갑작스런
폐암 진단을 받은 뒤…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신혼 당시엔 부부가 편하게 발 뻗기가 힘든 서울 미아리의 단칸방에서 시작했고, 사십대에 명예퇴직을 당하고 유학을 떠났을 때는 아내가 생계를 유지하느라 빵 장사를 했어요. 내가 회사에 나오면 집안일은 생각을 안 하고 일에만 몰두하거든요. 밤늦게 들어간 적이 많았고, 한창 일할 때는 주말을 챙길 시간도 없었죠. 자식들이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보기 힘드니, 어느 날은 아내가 “아버지 없이 얘들 키우느냐”며 한숨을 쉰 적도 있어요.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여유가 생기고, 이제는 갚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는데 그런 일이 생기니 삶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가장의 성공에 밑거름이 돼준 아내를 위해 앞으로는 봉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데 그 상대가 없다니, 허무하고 무서운 겁니다.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 중 배우자의 상실이 가장 크다는 그 말을 굉장히 실감하게 되는 거죠.”

손 총장은 “수술 후 1년이 지났지만, 나머지 1년이 암 환자에겐 중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현재 아내는 1년여 항암 치료를 마치고, 치료 과정에서 동반된 우울증 등 여러 정신적, 신체적 부작용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보내고 있다. 손 총장이 총리직 후보 자격, 즉 나랏일을 고사한 중요한 이유였다.

“총리 후보 1순위라는 얘기는 먼저 언론을 통해 들었죠. 처음엔 집사람이 아프다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밝히기 싫어서 이런 저런 사정으로 거절했는데, 결국 아내의 사정이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없던 얘기가 된 거죠. 미리 선수를 친 셈이라고 할까요. 아내가 아프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진정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행복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답을 얻은 거죠. 앞으로는 일 중심이 아닌 가족 지향이 되는 게 삶의 순리란 점을 깨달은 겁니다.”

요즘 손 총장은 “병은 감추기보다 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다소 여유를 찾은 모습이다.‘아내가 수술을 받고 건강하게 지내는 폐암 환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기뻐한다’ ‘집사람이 완치되고 건강해지면, 그 모습으로 또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 아니겠느냐’ 등의 긍정적 요인에서다.

애당초 금실 좋다고 알려진 부부였다. 손 총장은 “아내가 고비를 넘긴 이후 삶의 태도가 달라졌고, 새사람이 된 듯하다”고 말한다. 예전부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한 사람이지만, 그 폭이 더 넓어졌다는 것. 거기에서 아내의 힘든 투병기를 지켜봤던 남편의 변화가 궁금해졌다. 손 총장은 “환자는 누구보다 외롭다”면서 “당신은 절대 외롭지 않다고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환자에겐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는 실제 암 환자 가족으로 2년여 투병 과정을 지내 온 손 총장이 지금 고통받는 환자 가족들에게 보내는 조언이기도 했다. 손 총장은 아내의 건강 회복을 돕기 위해 다음 네 가지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중이라고 했다.

남편의 진심 어린 기도, 변화들…
“당신, 절대 외롭지 않을 거예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성당에 나가 새벽 기도를 합니다. 아내의 건강을 위한 기도지만, 그 대상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어요. 시각 장애인 손녀를 위해서, 서강대 장애인 교수를 비롯한 장애인들을 위해서, 더불어 현재 암 투병 중인 환자들과 고통받는 가족들 모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조찬 모임 스케줄은 잡지 않고 있어요. 새벽 기도를 마친 뒤에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아침 식사를 챙기며 대화를 나눠요. 그렇게 아내와 함께 할 시간을 만드는 거지요. 저녁엔 늦어도 10시 전에는 꼭 들어갑니다. 뜨거운 물수건으로 통증을 완화시켜주고, 가능하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지고 예민해요. 늦은 밤 기척 소리로도 잠을 깰 수 있고, 그러면 다시 잠을 못 드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밤 10시 전엔 꼭 들어가는 거죠. 병원에는 늘 함께 갑니다. 그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비우고 아내와 동행하지요. 환자는 외롭고 두렵거든요. 주말에는 함께 미사를 보고, 식사를 한 뒤 등산을 합니다. 아내의 건강이 더 이상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는 네 가지 약속을 꼭 지킬 겁니다.”

인터뷰 도중, 손 총장은 중요한 일로 전화를 걸 일이 있다며 기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지엔 아내가 적어 줬다는 두 개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올봄 시각 장애인 손녀가 입학한 초등학교의 교장과 담임의 번호다. 가족은 맹아학교 대신 일반 학교를 선택했다. 손녀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는 가족과 주변의 배려, 수고로움으로 하나씩 단계를 밟는 중이다. 전화를 마친 손 총장은 “일에 몰두하다 보면 자꾸 중요한 일상을 잊게 된다. 손녀 얘기가 나온 김에 전화를 걸었다”며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했다. 일 중심에서 가족 중심으로의 이동은 그렇게 현재 진행형이었다.

부부가 사는 서울 도곡동 집 근처엔 양재천이 흐르고 대모산, 청계산 등 가까운 산들이 있다. 농촌 출신인 손 총장은 자연을 접하고 있기에 좋은 마을이라고 했다. 겨울을 지나고 맞이하는 봄은 부부에게, 또 아내의 건강을 위해 좋은 계절이기도 했다. 아내는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따뜻한 볕을 벗 삼아 근처 양재천을 걷거나, 등산을 하는 것으로 활력을 얻고 있다. 이제는 일과 출세 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가족과 남을 위해 사는 삶이 행복하다는 점을 절실히 배웠다던 손 총장. 기자에게 건넨 명함에 적힌 손 총장의 세례명은 요한 보스코였다. 대학 시절, 불우한 주변을 돕는 일에 평생을 받쳤던 돈 보스코 성인전에 감동받은 세례명이란 설명. 손 총장은 돌이켜보면, “각자의 인생엔 길이 있는 것 같다”며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특별한 부부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는 말에, 소박한 답이 돌아왔다.

“집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갖자고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함께 책을 읽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눌 거고요. 아, 어제는 자유로를 드라이브하면서 저녁을 먹고 왔는데, 참 좋아하더군요(웃음).”

강승민 기자/ 사진 이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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