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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총괄 맡아 차기 사장 예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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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29면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40년간 세계 자동차 1위를 지켜온 미 제너럴모터스(GM)의 아성을 깨고 정상에 등극해서가 아니다. 창업 일가 4세의 경영 승계가 초읽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매출 300조원, 임직원 36만 명인 도요타 그룹에서 창업 일가는 일왕(日王)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도요타자동차 창업주 4세 아키오 부사장

도요타는 24일 창업자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郞·52년 사망)의 장손이자 도요타 쇼이치로(章一郞·83) 명예회장의 장남인 도요타 아키오(章男·52·사진) 부사장을 해외 생산·판매 총괄 부사장에 임명했다. 아키오는 지난해 6월 내수 판매 부사장을 맡았지만 좋은 실적을 내지 못해 사장 승진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본 재계에선 아키오 부사장이 좋은 경영 실적을 올리고 있는 해외 부문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경력 관리에 들어가 내년 6월께 사장에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의 도요타 전문가도 “실적이 나쁘면 사장이 될 수 없다는 도요타 경영 원칙에 따라 아키오 부사장에게 좋은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사업본부를 더해 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키오가 내년에 사장에 오를 경우 1995년 이후 14년 만에 도요타 경영권이 전문경영인에서 창업 일가로 넘겨지게 된다.

도요타 창업 일가의 경영 참여는 쇼이치로 명예회장의 동생 도요타 다쓰로(達郞)가 95년 사장을 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중단됐다. 이후 오쿠다 히로시(奧田碩·현 상담역), 조 후지오(張富士夫·현 회장), 와타나베 가쓰아키(渡邊捷昭·현 사장) 등 전문경영인 3명이 14년째 경영을 맡아 오고 있다.

일본에선 아키오가 사장이 되더라도 도요타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도요타의 독특한 의사결정 시스템 때문이다. 도요타는 사장에게 전권을 부여하지 않는 집단 의사결정 체제를 갖고 있다.

또 아키오가 사장이 되더라도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할 조 후지오 현 회장과 와타나베 가쓰아키 현 사장(차기 부회장 후보) 등이 중요한 투자나 임원 인사에 간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쇼이치로 명예회장의 동의를 얻는 형태다.

아키오 부사장에게 쇼이치로 명예회장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을 역임하고 ‘글로벌 도요타’ 체제를 정착시킨 쇼이치로 명예회장은 아직도 임원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요타는 지난해 세계 1위 자동차 업체로 부상할 정도로 그룹 규모가 커지자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 창업자 장손에게 사장을 맡기는 수순을 밟아 왔다. 도요타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2조3000억 엔(약 23조원)으로 일본 기업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창업 일가의 도요타 보유 지분은 2% 미만이다. 하지만 일본 언론이나 시민단체들은 도요타 가문의 경영 승계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실적에 따라 평가할 뿐이다. 한 일본 재계 인사는 “아키오가 사장이 된 뒤 도요타의 실적이 악화된다면 언론에서 반드시 문제를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도요타 그룹에는 아키오뿐 아니라 도요타 에이지(英二·91·현 최고고문) 전 사장의 두 아들이 계열사에서 근무 중이다. 에이지의 장남 간시로(幹司郞)는 도요타 계열 부품업체 아이신정기의 사장을, 차남인 데쓰로(鐵郞)는 도요타자동직기의 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이들 도요타 일가는 그룹의 결속력을 다지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룹 내 계열사 간 결속 강화를 위해 오히려 창업 일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창업 일가 자손 모두가 중용되는 것은 아니다. 도요타는 능력이 떨어지는 친족은 경영에서 배제한다.

요코하마국립대 조두섭(경영학) 교수는 “일본에서 최고경영자 선출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경영 능력”이라고 말했다. 경영 능력이 있다면 창업 일가의 경영 승계가 문제될 게 없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또 “도요타가 글로벌 기업인 만큼 아키오가 자신의 고독한 결단을 통해 경영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며 “경영 능력 검증 없이 사장이 될 경우 한국의 현대자동차에 추격의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요타에 전문경영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49년. 당시 심각한 경영난을 겪던 창업자 기이치로는 보유 주식 대부분을 담보로 긴급 융자를 받으면서 1500명을 해고한 뒤 퇴진하면서 이시다 다이조(石田退三)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줬다.

이시다 사장은 경영이 호전되자 기이치로에게 사장직을 다시 넘기려 했으나 기이치로가 52년 3월 뇌일혈(58세)로 사망해 무산된다. 이후 67년 전문경영인 나카가와 후키오 사장이 기이치로의 사촌 동생인 도요타 에이지에게 사장직을 돌려줌으로써 창업 일가가 경영권을 갖게 됐다. 이후 쇼이치로·다츠로 등 창업 일가가 95년까지 경영을 책임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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