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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 왜 중요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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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해는 전자공학 100주년이다. 영국의 과학자 존 앰브로즈 플레밍이 2극 진공관을 발명한 것이 1904년인데, 이것은 곧 정류.증폭.발진이 가능한 3극 진공관으로, 3극 진공관은 반도체 트랜지스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트랜지스터가 전기.전자.컴퓨터의 혁명을 가져오고,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사실은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다.

플레밍의 2극 진공관 발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1880년대에 널리 보급된 전구는 그 내부가 검게 탄화돼 효율이 떨어졌다. '에디슨 효과'라고 불린 이 현상 때문에 에디슨은 골머리를 앓았고, 당시 영국 에디슨사의 과학고문이던 플레밍은 이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연구에 착수했다. 전구 내부에 또 다른 전극을 삽입하고 실험을 하던 중, 플레밍은 이 전극과 전구의 필라멘트 사이에 전류가 항상 일정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과학적으로 새로운 것이었지만, 당시엔 아무런 실용적 가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플레밍은 이 원리를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수신기에 응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는 곧바로 2극 진공관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기초과학이 왜 중요한가? 플레밍의 사례가 보여주는 답은 기초과학의 발전이 기술의 발전을 낳고, 기술의 발전이 경제의 동력으로 국가 경쟁력의 고양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범답안이다.

그런데 이렇게 경제논리로만 과학을 생각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우선 과학 연구가 기술과 산업으로 이어지는 데 시간 갭(gap)은 물론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플레밍의 기초연구는 1889년에 이뤄졌는데, 2극 진공관은 1904년에 발명됐다. 15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존재했다. 이는 지금의 기초과학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줄기세포 연구, 양자 컴퓨터 연구도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리면 몇 년이면 응용 가능할 수 있지만, 운이 없으면 영영 상용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과학은 기술을 낳는다'는 측면만 강조하다 보면, 정부와 기업은 당장 기술로 이어지지 않는 과학을 선뜻 지원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기초연구가 다 기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기술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과학연구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요즘은 이러한 순수연구도 종종 비싼 기기를 필요로 하고, 국민의 세금에서 마련된 상당한 액수의 연구비를 사용하기도 한다.

국가가 경제논리에서 벗어나 당장 기술개발과 상대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기초 과학 연구까지도 지원해야 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과학은 과학문화로서의 가치가 있다. 과학문화는 과학적 세계관을 고양하고, 합리적 비판정신을 높게 사며, 현대 사회가 만들어내는 여러 문제에 대해 균형 잡힌 전문가를 키우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주론.진화론.입자물리학과 이론과학의 연구는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며, 권위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새로움을 높게 사는 과학의 정신은 합리성의 원천이 된다.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학의 의사소통 과정은 바람직한 전문성의 모델을 제공한다.

둘째로 기초연구는 교육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대학에서 즉각적으로 기술과 산업에 필요한 내용만 교육한다면 이런 지식은 당장은 쓸모가 있겠지만, 기술의 발전과 변화에 무력하다. 결국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 할수록 학생들에게 근본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연구 결과를 내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 해놓은 것을 조금 개량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정말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펀더멘털의 수준에서 창의적일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하며, 이러한 교육은 기초과학 연구가 제공할 수 있다.

기초과학과 기초연구가 왜 중요한가? 토대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기술, 문화, 교육이 그 위에 굳건한 집을 지을 수 있는.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