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파일>시고니 위버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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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성고문을 당한 여성(시고니 위버)이 가해자로 보이는 남자(벤킹슬리)와 맞닥뜨린다.눈을 가린채 당한 일이지만 목소리와 냄새만으로도 그임을 알 수 있다.폭풍우로 전기와 전화마저 끊어진 외딴 집.가해자는 술에 골아떨어졌고 고문 당한 여성의 손에는 권총이 있다.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 있지만 여자는 진실한 자백을 원한다.그러나 가해자로 짐작되는 남자는 한사코 결백을 주장한다.
늦은 밤에서 새벽6시까지,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작은 섬의 외딴 집.단 세 명의 등장 인물과 어둡고 우울한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잘 짜인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같은 긴장과 서스펜스,의문과 혼란,분노와 서글픔이 가득 한 영화다.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질만큼 닫힌 공간속의 진행이 너무나 타이트하고 극적이다.피해자인 여성 스스로가 가해자를 응징한다는 점 때문에 속이 후련해질 것같은데 오히려 답답해진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독재국가 시절의 성고문 실상이 인간으로서의 상상을 절하며,이 상황의 심판자라 할 변호사,즉 지식인인 그녀의 남편(스튜어트 윌슨)의 우유부단한 태도,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침내 입을 연 가해자의 자백조차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힘이 넘치는 영화 『시고니 위버의 진실』은 로만 폴란스키의 94년작이다.야한 영화로 알려져 인기를 끌었던 『비터문』으로 찬반 양론의 평가를 받았지만 고립된 인간의 상황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관된 연출세계를 지키고 있고 의상 .카메라.음악등의 분위기를 그 주제와 잘 접목시킨다는 점에서 퍽 신뢰가 가는 감독이다.
〈비디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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