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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22.프란체스카와 결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이승만(李承晩)박사는 한국근대사상 처음으로 국제결혼을 한 국가최고지도자였다.그의 배필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체스카 도너양.대한민국의초대「퍼스트 레이디」로서 민비(閔妃:명성황후)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이 벽안(碧眼)의 여인은 과연 어떤 인물이며 李박사는 어떻게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는가.그 사연을「이승만 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프란체스카 도너양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市 교외 인서스도르프에서 1900년6월15일 소다수 공장을 운영하는 상인 루돌프 도너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셋째이며 막내딸로 태어났다.
순수한 게르만 혈통을 자부하는 그녀의 가정은 가톨릭을 믿는 보수 중산층이었다.프란체스카의 애명은「파니」,그리고 가톨릭 영세명은「마리아」였다.아들이 없었던 아버지 루돌프는 수학과 외국어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파니로 하여금 가업을 잇 게하기 위해파니를 상업학교에 진학시켰다.상업학교 졸업후 한때 농산물중앙관리소에서 일했던 파니는 스코틀랜드로 유학,영어를 익혀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따냈다.
모국어가 독일어인데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했으며 속기(速記)와타자(打字)의 특기보유자였던 파니는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던 망명정객 이승만의 비서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그녀에게 한가지 흠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녀가 20대초반에 결혼하여 실 패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러나 이승만에게도 이러한 하자가 있었던 만큼 이것은 두사람의 결합에 결격사항이 될 수 없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파니가 이승만을 처음으로 「랑데부」한 것은1933년 2월21일 제네바의 호텔 드 륏시에서였다.이날 오후제네바 국제연맹본부에서 국제회의 개막식이 있었기 때문에 호텔 식당은 초만원을 이루었다.식당에 늦게 들어선 이승만이 파니와 그의 어머니가 미리 자리잡은 식탁에 동석하면서 운명의 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파니쪽에서 시작되었다.묵묵히 식사하는「노신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파니는 금강산과 양반등 한국에관한 자신의 지식을 털어놓아 이승만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첫눈에 파니에게 반한 것은 아니었다.2월21일자「이승만 일기」에는 그날 함께 점심을 들고 국제회의를 참관한 두 미국여인(로잔 대학에 유학하는 메리암 양과 브라운 여사)의 이름이 나타날 뿐 파니 모녀에 대한 언급은 없다.이승만 일기에 프란체스카 도너양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5월9일부터였다.일기에서 이승만은 그녀의 도움으로 베를린의 독일은행으로부터 남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이승만과 파니 사이에 결혼에 대한 진지한 대화가 오간 것은이승만이 외교목적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위해 7월초 빈에 들렀을 때였다.7월7일 빈에 도착한 이승만은 편지로 파니에게 연락하여 이틀후 만났다.
이날 저녁 두사람은「헬메스 별장」에 다녀왔다.두사람이 서로의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한 것은 아마도 이 데이트에서였던 것 같다.7월15일 이승만이 빈 외교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향해출발할 때 파니는 기차역까지 마중나와 이승만의 짐을 객실에 실어준 다음 기차가 멀리 떠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전송하였다.
이승만은 이 때의 만남을「빈 연사(戀事)」라고 일기에 적었다.
모스크바 외교행각에서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이승만은 또한번 빈에 들러 하루 머물면서 파니를 만난 것 같다.그후 미국에 귀착한 그는 34년 정초부터 워싱턴에서 파니의 입국수속을시작했다.그러나 빈주재 미국영사관에서는 동양인과 결혼하기 위해미국으로 가겠다는 파니에게 쉽사리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결국 이승만은 7월22일 美국무부의 정치고문 혼벡박사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한 끝에 드디어 9월26일 파니에게 비자가 발급되었다.
이승만과 파니의 결혼식은 파니가 뉴욕에 도착한지 나흘만인 10월8일 뉴욕 렉싱턴街에 있는 「호텔 몽클레어」의 특별홀에서 치러졌다.왜 결혼식이 이 호텔에서 열렸느냐 하면 이승만의 프린스턴大 동창생인 킴벌랜드 대령부처가 당시 이 호텔 에 장기투숙하고 있었고 그들이 두사람의 결혼식을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결혼식은 한국인 윤병구(尹炳求)목사와 미국인 홈스목사가 공동으로 집전했다.
결혼 당시 이승만은 별세한 파니의 아버지와 동갑인 만 59세였고 파니는 34세였다.이 두사람의 국제결혼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무처리능력이 탁월했던 파니는 노년기에 접어든 망명정치가에게 필수불가결의 동지(同 志)요 반려(伴侶)가 되었다.그러나 한인교포들은 대체로 이승만의 국제결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이승만을 아끼는 하와이 동지회 간부들은결혼소식에 접하자 두번(10월23일과 25일)이나 전보를 쳐 하와이에 오려거든 먼저 혼자 건너와서 국제결혼을 하게된 경위를밝히라고 했다.
그러나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이승만 부처는 이러한 전보를 아랑곳하지 않은채 유유히 美대륙을 자동차로 여행한 다음 1935년1월24일 호놀룰루港에 도착했다.이어 베풀어진 환영회에는 뜻밖에도 1천7백여명의 교포 하객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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