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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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17)『역에서 날 봤을 때,이 자식 순 친일파로구나 생각하진 않았니?』 『생각하고 말고가없지,사실이니까.』 『무슨 소리야?』 『친일파라는 소리는 너보다도 내가 더 많이 듣고 산 사람이다.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창씨개명한 집안이 바로 우리거든.』 이층 집들이 늘어선 거리에나붙어 있는 간판들을 바라보면서 둘은 천천히 나가사키 시내를 걸었다.길남이 인부들의 부식을 배급받으러 가는 길에 지상이 함께 나선 길이었다.
멀리 전차가 지나가는 것이 바라보였다.비가 내렸었지.나가사키역에 무슨 포로나 되듯 줄줄이 끌려와서 자신들을 인솔해 갈 사람을 기다리던 때를 지상은 떠올렸다.
길남이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했다.제딴에는 한껏 멋을 낸 길남의 옷차림과는 달리 지상은 누가 봐도 초라한 노동자 그대로였다. 『너 무슨 일이 있었다면서?』 『왜,이상한 소문이라도 들었냐?』 『술먹고 개판쳤다면서.사람이 변했다고도 하더라.공연히인부들에게 소리도 질러대고.』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지.내 짐작인데… 너 혹시 그 탄광에서 알았다던 여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서…그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냐?』 『족집게 무당이 따로 없네.』 길남이 껄껄 웃고 나서 지상의 등을 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너야말로,그 여자하고는 어떤 사이냐.』 사라져가는 전차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상은 문득 미치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빠는 말했었지요.대학에서 사귄 조선인 친구가 있는데 자기는 그 친구에게 늘 진다고 말이에요.여간 우수하지 않다면서,일본까지 유학을 올 조선인이라면 아마 그쪽에서 상당히 똑똑한 젊은이였을 게 분명하다는 말도 했어요.다만 이상한 게 있다고 했지요.그 사람은 조선에 대해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대요.자신은일본 국민의 한 사람이라고만 말한대요.몇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뛰어난 젊은이가 왜 그런지,그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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