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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는 꼭 지켜야 할 세계적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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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000년 어느 봄날, 제주를 방문한 미국 영화감독 바바라 해머(69·사진)는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 잠수복을 입고 걸어오는 해녀들을 만났다.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 고단한 삶의 파고를 온몸으로 이겨내는 강인한 여성들. 페미니즘과 실험 영화의 대모로 불려온 해머는 해녀들에게 매료돼 당장 카메라를 갖다댔다. 그리하여 다큐멘터리 ‘제주도 해녀’가 탄생하게 됐다.

감독의 난소암 투병으로 영화는 지난해 말에야 완성됐다. 세계 첫 상영을 위해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18일까지, 서울 신촌 아트레온)를 찾은 해머 감독을 만났다. 커밍아웃을 한 레즈비언인 그는 지금까지 8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99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제주도 해녀를 어떻게 알게 됐나.

“2000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안내책을 보다가 ‘제주도는 여성 다이버로 유명하다’라는 짧은 문구에 강하게 끌렸다. 여성들만의 그런 전통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당장 제주도로 내려가 약 1주일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촬영하는 강행군을 했다.”

-영화내용을 보니 직접 해녀 생활을 체험하기도 했던데.

“해녀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잠수복을 입고 물속에 들어가 봤다. 취미로 다이빙을 하고 있기도 하다. 오염 때문인지 물속이 온통 회색인 게 기억에 남는다. 전혀 낭만적인 체험이 아니었다(웃음). 생계를 위해 그런 일을 매일 해야 한다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해녀들의 태도는 놀라웠다. 말투가 거칠고, 살가운 면이 없긴 했지만 고된 일을 하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가며 피로를 푸는 게 보기 좋았다. 나도 같이 춤추고 노래했다. 해녀들의 끈끈한 연대감은 가히 여성학적인 연구 대상이다.”

-해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뒤 느낀 점은.

“가부장적인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 해녀라는 여성 전통이 대대로 이어져 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계속 숫자가 줄고 노령화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국 정부에서 이렇게 세계적으로 귀한 문화와 전통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외국인으로서 해녀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많이 힘들었지만, 일단 촬영에 들어간 뒤에는 해녀들이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들의 힘든 삶을 담담하면서도 자세하게 해줬다. 그들이 이방인인 나를 잘 참아줬다고 생각한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원래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실험·퀴어(동성애 관련 영화) 영화 감독으로 유명한데.

다큐멘터리 '제주도 해녀'의 한 장면.

“해녀는 내가 잘 모르는 소재라 감히 실험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잘 아는 걸 다룰 땐 대담한 시도를 한다. 예로, 상영관에서 영사기를 여러 방향으로 바꿔가며 상영하는 식이다. 관객들은 수동적으로 한자리에 앉아 있는 대신, 프로젝터가 가는 방향을 따라 움직여가며 능동적으로 영화를 보는 거다. 고정관념인 사각형 스크린 대신 거대한 풍선을 스크린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

-영화를 통해 진보 성향의 목소리를 활발히 내고 있는데.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을 뿐이다. 그러려면 공상만 할 게 아니라 행동에 옮기는 실천이 필요하다. 나의 실천 방법은 영화다. 난소암 투병 뒤 삶의 소중함을 배우게 됐다. 행복하게 사는 것의 소중함도 느끼게 됐다. 이왕이면 모두가 행복한 게 좋지 않겠나.”

-영화 쪽에서 일하게 된 데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들었는데.

“사실 어머니는 내가 셜리 템플과 같은 아역 배우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나를 바비 인형처럼 키우려고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웃음). 우크라이나에서 이민 온 가난한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딸만은 귀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나중에 영화 감독을 하겠다고 하자 ‘너무 힘든 일을 하려고 한다’며 걱정했다. 내 첫 작품을 완성하기 몇 달 전에 돌아가셔서 가슴 아프다.” 

글·사진=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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