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럼>事故공화국을 지탱하는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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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몇해전 서울에서 근무했던 외국의 한 상사대표가 『한국은 불가사의한 면이 많은 나라』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도처에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도 나라전체는 잘 굴러간다는 것을 빗대서 한 말이다. 요즘 국내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는 굵직한 사건들을 접하다 보면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삼풍백화점 대참사등 잇따라 터진 대형사건으로 국민들의 놀란 가슴이 채 가라 앉기도 전에 현직 장관의 입을 통해 나온 전직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 조성파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가위 「사건.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어렵게 됐다.
이 사건으로 금융권과 기업들은 자칫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을까 해서 숨을 죽이고 있다.야당은 호재(好材)를 만났다고 해서 공세준비에 한창이다.그러던 참에 신당 김대중(金大中)고문의 비자금 조성내용이 자세히 적힌 「괴문서」까지 나돌아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의혹만 증폭(增幅)시키고 있다.게다가 정파간갈등과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는 야당이 과연 비자금의 비리를 얼마나 파헤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6.27선거 참패후 아직도 방향타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집권당과 정부의 입장에선 죽을(?)맛일게다.국면을 전환할 해법을 찾아야 할 터인데 묘방은 없고 오직 대통령 한사람의 결단만 쳐다보고 있는 모양새다.
나라 돌아가는 꼴이 이런데도 국민들의 일상생활에는 별 변화가없어 보인다.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언제 또 예기치 못한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자기 생활에 충실한 것같다.해변등 유명관광지는 인파로 덮여 있고, 김포공항은 해외여행 가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모습도 달라진 것이 없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경제현상이다.정국과 사회불안이 겹쳐 있는데도 나라경제 전체는 대체로 순항(順航)하고 있다.올 2.4분기까지 성장률이 두자리대를 보이고 있고 크게 걱정했던 물가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경상수지적자 폭만 당초 계획 보다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보도를 통해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온통 문제의 나라인 것처럼 보이는데도 막상 나라경제 전체나 국민생활은 큰 동요가 없으니 외국인에게 한국은 불가사의한 나라로 인식될 수밖에 없을것이다. 그 힘은 무엇일까.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제의 힘」이라고 말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대에 들어선 나라는 웬만한 사회불안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선진국의 경험에서 보아왔다.장기집권 했던 자민당(自民黨)이 붕괴된 뒤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경제강국의 위치 를 고수하고있지 않은가.경기침체와 엔貨강세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들의 높은 기술력과 해외에 심어놓은 투자씨앗 등으로 일본의 경제력은 좀처럼 흔들림이 없다.
우리의 수준은 아직 일본과 비교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상당한경제력을 키워온 것도 사실이다.그 공(功)은 복합적인 것이지만기업의 업적을 제1로 삼아야 할 것이다.노사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경영자와 근로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 오늘의 부(富)를 축적해 놓은 것이다.
경제성장은 중산층을 두텁게 해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해왔다.기능공들까지도 자가용을 몰고 일터에 나갈만큼 우리 모두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향상됐다.이처럼 기반이 다져졌기 때문에 정국이 어수선하고 사회가 불안정해도 나라 전체는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것이다.
지금 기업들은 21세기를 겨냥해 부단한 기술개발과 적극적인 국내외투자를 통해 경제를 한단계 올려놓기 위한 전략마련에 고심중이다.한국기업의 능력은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이들의 전략구축에 정치권이나 정부가 걸림돌이 돼서는 곤란하다.
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널(AWSJ)은 최근「金씨들의 전투 제2기」라는 사설을 통해 한국은 新3金논쟁으로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지 말라고 우정어린 충고를 했다.새로운 정치적 불안,기업활동에 대한 정부의 간섭 등으로 한국은 재도약의 기 회를 놓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외국언론을 인용하는데 다소 거부감도 느끼지만 정치위주.관변주도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한 AWSJ의충고를 우리 위정자들은 한번쯤 음미해보는게 좋겠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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