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대통령 권한대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청지기는 주인이 가장 신뢰하는 종이다. 그는 주인이 맡긴 재산을 관리한다. 그의 운명은 주인에게 달렸다. 하지만 주인의 신임을 받는 동안 청지기는 전적으로 자기 책임 아래 집안을 경영한다. 청지기의 미덕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업적을 내는 능력이다. 청지기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선량한 관리자다.

신약성경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1달란트(금과 은의 중량단위)와 2달란트, 5달란트를 각각 맡긴 세 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이 돌아오자 2달란트와 5달란트를 맡은 종은 맡았던 돈만큼 재산을 불려 주인을 기쁘게 했다. 1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주인은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할 줄 알고 1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 놨다"며 원금만 돌려줬다.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며 그를 쫓아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재산으로 여겨 죽는 날까지 신에게 충성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라는 근대의 청지기 정신, 즉 소명의식으로 부활했다. 소명의식은 자본주의 발전의 정신적 토양이 됐다.

고건 국무총리가 맡은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학적 의미는 선량한 관리자의 임무라고 한다. 언젠가 뚜렷하게 나타날 주인에게 나라 관리의 손익계산서를 보여줘야 하는 위치다. 대체로 그의 충성심과 관리능력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문제는 충성심과 능력을 어떤 방향으로 발휘하느냐다. 그건 고건 대행이 앞으로 올 주인을 누구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국민이 주인 아니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그 집합적 주인의 정신은 이미 분열돼 있다. 결국 그는 다시 맞이할 주인으로 노무현 대통령이나 미지의 새 대통령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미지의 새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쳤다가 盧대통령이 다시 돌아올 경우 졸지에 불충한 청지기로 추락할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1달란트를 맡았던 청지기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쓰기 십상이다.

권력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딜레마가 아니라 트릴레마(trilemma.3자택일의 궁지)에 빠져 있는 셈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그토록 어려운 자리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