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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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13) 『이런 덜 떨어진 녀석 봤나.』 혀를 차면서 육손이가 엎어져 있는 길남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육손이는 뒤에 서 있는 삼식이에게 말했다.
『넌 가서 냉수나 한 사발 가져와.』 길남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눈을 떴다.
『야 이녀석아,해가 똥구멍을 치받쳤어.이제 좀 일어나서 요기를 해야 할 거 아냐.』 부숭부숭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길남이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술이 아무나 먹는 건 줄 아니.그리고…무슨놈의 술을 이렇게되도록 마시나,술도 음식이라는 말 몰라?』 삼식이가 가져온 물을 길남은 소리를 내며 벌컥벌컥 마셨다.삼식이에게 가서 네 일이나 하고 있으라고 보내놓고 육손이는 길남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술국을 끓여놓으라고 했으니 식당에 가서 우선 뭘 좀 먹으라는 말에 길남은 고개를 저었 다.
『왜 속이 쓰려서? 너 술을 그렇게 혼자 먹고 날치는 식으로몸에 익혀서는 못 쓴다.그래서 술은 어른 앞에서 배우라는 말이있는 거야.』 햇빛이 눈에 부신듯 눈을 가늘게 뜨고 서 있던 길남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냥 앞이 캄캄한게…』 『무슨 일인데 그래?』 『아저씨한테 얘길 해봐야 못난 놈 소리나 한번 더 들을 일이지요.』 『나한테 말 못할 일도 없지않니.』 마당 가의 둔덕에 쭈그리고 앉으면서 길남은 고개를 숙였다.육손이도 따라서 그의 옆에 앉았다.
『여자가 죽었대요.』 『무슨 여자? 섬에 두고 온 그 여자 말이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길남을 바라보다가 육손이가 몸을 일으켰다.숲을 내려다보며 서서 그는 뜻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바다에 몸을 던졌다네요.나 도망친 후 이런 저런못 볼 꼴을 당했던가 봅니다.』 육손이 길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다독거리듯 그 손으로 길남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육손이 말했다. 『너무 너 자신을 볶지 말아.잊혀지면 잊고…안 되면 또 어쩌겠냐.그러며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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