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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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 (12)화순이가 죽다니,그걸나는 한번이나 상상이나 했던가.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낼 것을 철석같이 믿지 않았던가.세상이 다 무너져내려도 화순이만은 살아있을 거라고,미련하게도 그렇게 믿지 않았나 말이다.
허청허청 숲길을 걸어올라가면서 길남은 어금니를 더욱 힘주어 물었다.그랬다.난 그걸 단 한번이라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세상에 죽어야 할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살면 산만큼 세상을 더럽히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왜 그 여자가 죽어야 해.왜 화순이가 죽어야 해.
걸음을 멈춘 길남은 우두커니 컴컴한 숲길에 서 있었다.내려뜨린 그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우드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그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을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닦았다. 다시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난 길남이 산으로 뻗어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날 못 믿었던 건가.찾으러 간다던 내 약속을 화순이는 믿을 수가 없었던 걸까.나는 이제 어디로 가지.무엇에 세월을 걸고 살아간다지.
『화순아.』 길남이 소리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메아리도 없이 그의 목소리는 밤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어둠 속으로 퍼져갔다. 다음날 늦은 아침이었다.진규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서며 육손이가 중얼거렸다.
『앗따,이 냄새….』 뒤따라 들어오던 삼식이에게 그가 소리쳤다. 『문이라도 좀 열어라.이게 세상에 냄새치고 젤로 더러운게사람 냄새라더니,이 녀석을 두고 한 소리네.』 옷을 벗지도 않은 채 널부러지듯 엎드려 있는 진규의 몸을 흔들면서 육손이가 말했다. 『야,이놈아야.일어 좀 나거라.』 몸을 한번 뒤치기는했지만 길남은 다시 엎드리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놈이 이거 헛똑똑일세.술은 아무나 먹는 건 줄 아나.큰일아닌가.』 뒤에 서 있는 삼식이를 돌아보면서 육손이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하여튼 엉망으로 취해가지고는 인부들 숙소에 와서 소리를 질러대질 않나,다 죽인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끌어다눕히느라고 여간 애 먹은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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