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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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8)『시침 뗄 때는 언제고,왜 갑자기 이렇게 급해?』 『이름이 뭐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어?』 『이제보니 너 군수공장에서 총은 안 만들고 여자만 사귀었던가 보구나.이름을 대야 알 정도로 여자가 많다 이거냐 뭐냐.』『시끄럽다,그만둬라.』 지상이 골짜기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갔다.어떻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미치코가 여기까지 나를찾아왔다니.아니다.그럴 수는 없다.계곡 쪽에서 이름모를 새 울음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그 울음소리가 한줄기 빛처럼 어둠 속에 울려 펴졌다가 사라져버리자 숲길은 더욱 조용해졌다.그 사이로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끊일 듯 끊일 듯 들려왔다.
네가 가겠다면 강물을 건너게 해주마.미치코를 처음 안던 날 했던 말을 지상은 떠올렸다.
네가 나를 떠나기 위해서 저 강물을 건너야 한다면 내가 그 강물을 건너게 해주마.왜 그런 말을 했던가.짧은 만남의 후에 기다리고 있을 길고 긴 헤어짐을 그때 이미 나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그러면서도 그녀를 안아야 했던 내 서글픔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밤.
네가 보고 싶다면 강물을 보여주마.아침이면 눈부시게 빛나며 소리쳐 흐르는 강물을,저녁이면 반짝이며 소리없이 잠드는 강물을,저 조선의 강물을.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에게 가장 귀한것을 주고 싶어지리라.그러나 그때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너를 사랑하게 된 한 남자를 길러준 땅,그 조선의 산하만이그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었다.그 때 저 조선 의 강물을 보여주고 싶다던 내 마음의 깊은 곳을 너는 알았을까.
지상이 서 있는 등 뒤로 길남이 다가왔다.며칠 전 내린 비에물이 불었는가.냇물 소리가 한결 크고 가깝게 들려왔다.
『그 여자.이름은 미치코라고 하더라.』 지상의 귓가에 길남의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다가왔다가는 멀어져 갔다.
『말했다,그 여자한테.네가 여기 있다는 얘기도 했고 만나게 해 주겠다고도 했다.와서 날 찾으라고,그러면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지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며칠 안에 온다고 했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길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좋은 여자 같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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