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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기행>"히틀러의 죽음"아다 페트로바.피터 위슨共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20세기의미스터리중 하나인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당시 패전중인나치군의 사기저하를 우려한 나치당국자들이 그의 죽음을 미화한데다가 그가 죽은 현장인 베를린의 벙커를 먼저 점령한 소련까지도냉전시절 내내 침묵을 지키면서 그의 죽음은 신화 적 이야기로만남아 있었다.
심지어 히틀러가 이탈리아 북부의 한 동굴에 은신하고 있다느니,알프스에서 양치기로 변신했다느니,카지노의 도박대에서 일하고 있다느니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언론매체를 타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92년 러시아 비밀 문서보관소에서 히틀러의두개골이 담긴 상자가 러시아 저널리스트 아다 페트로바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면서 히틀러의 죽음은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페트로바가 영국의 넌픽션 작가 피터 슨과 공동으로 그간의 연구결과를 집대성한 것이 『히틀러의 죽음』(The Death of Hitler.Norton刊)이다.
이 책은 소련군이 히틀러의 벙커를 점령한 1945년 5월2일,히틀러와 그가 죽기 하루전에 결혼식을 올린 에바 브라운 등이마지막을 보냈던 베를린의 벙커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재구성해내고 있다.또 소련이 히틀러의 죽음을 둘러 싼 기록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비밀에 부쳤던 이유,히틀러측근들의 심문내용,히틀러가 젊은 시절에 그렸다가 최후의 순간까지 곁에 두었던 수채화 36점도 실려 있다.
소련이 베를린 벙커를 먼저 점령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당시 아이젠하워 연합군사령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베를린이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드러내보였다.그때 스탈린은 독일수도 베를린이 지니는 상징적 중요성을 인식,군 당국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린다.이것이 그후 소련의 동유럽 지배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저자들에 따르면 히틀러의 경우 청산가리 캡슐을 씹으면서 다시한번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권총을 쏘았다고 한다.히틀러 두개골의 총상은 턱에서 위쪽으로 나 있었다.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5월1일 밤9시30분,함부르크 방송에서 중대발표를 예고한 뒤브루크너의 7번 교향곡등을 내보내다가 히틀러의 죽음을 발표했다.군대를 지휘하던중 그날 오후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이 뉴스는세계의 주요 언론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영국의 더 타임스등 전세계의 언론들이 나치당국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히틀러의 죽음이 4월30일이었으며 그것도 전사가 아니라 자살이었다.같은 날 요제프 괴벨스 부부도 여섯 자녀에게 독이 묻은 초콜릿을 먹여 먼저 살해하고 자신들도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소련군이 벙커에 당도한 것은 5월2일.그들은 폭격으로 파헤쳐진 구덩이에서 불에 그을린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신을 파냈다.뒤에 히틀러의 죽음에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고 느낀 소련군은이들의 시신을 장기간 조사한 뒤 베를린에서 30 마일 떨어진 지점에 묻었다.이때 독일인 약 8백명이 심문을 당했는데 히틀러의 애견관리자.비서.운전사등 70여명은 소련의 교도소에까지 끌려가 불고문등을 당하기도 했다.
히틀러.에바 브라운.괴벨스 가족들의 시신은 그 이후에도 몇차례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며 묻혔다가 파뒤집혀지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70년 화장돼 엘베강에 뿌려졌다.총알자국이 난 것을포함,히틀러의 두개골 4조각은 1946년에 벌어 졌던 소련의 제2차 벙커수색과정에서 발견돼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히틀러는 1945년 1월16일 전선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와 곧장 벙커로 들어간 뒤로는 밤에만 몇차례 벙커를 빠져나왔을 뿐 최후의 순간까지 햇빛을 한번도 보지 않았다고 한 다.
히틀러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시기는 1945년 4월20일 56번째 생일을 맞으면서였다.그때 이미 그는 건강이 악화돼 언론에 실리는 그의 사진도 정해진 각도로 제한돼 있었다.그는 4월29일 벙커에서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유서는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국가에 헌납하고 유럽 각 지역에서 약탈한 수많은 그림들은 그의 고향마을인 오스트리아의 린츠에 호화 박물관을 세워 전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저자들은 소련당국이 히틀러의 두개골등을 비밀로 부쳤던 이유에대해서는 히틀러를 격하시키기 위해 군인으로서는 불명예스런 방법인 독약자살을 고집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鄭命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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