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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신비로운 사랑을 꿈꾸지 못하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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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24면

이런 사랑도 있다. 여섯 살 때 아버지와 가까운 분의 결혼식에 갔다. 신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눈동자가 마치 거대한 빙하에서 퍼 올린 수정 구슬 같았던 신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향기 때문이었다. 살구즙 향기.

그 싱그러운 향기는 어린 영혼마저 사로잡는 강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에서 뚝뚝 들어 날 듯한 그 아련한 살구즙 향기를 폐가 짓무르도록 오래오래 들이마셨더랬다. 하나, 시간은 모든 견고한 사랑을 부식시켜 버릴 만큼 강한 산성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며 그 향기는 점차 휘발되어 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그녀에게서도 향긋한 살구 냄새가 났다. 그 향기는 사랑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했다. 지금 있는 것의 가치를 무화하고 옛것의 진정성을 되살아나게 했다.

더욱이 그녀는 생김새마저 똑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여인이 되살아난 듯싶었다. 따지고 보니 오래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건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지금 이 여인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도록 운명이 복선을 깔아놓은 격이었다.

아마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을 터다. 그 하나는 “잠시 불타올랐다가 곧 이전의 광채를 잃어버리는, 금세 지루한 일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평범한 사랑”이다. 다른 하나는 “절대·순수·운명·복종, 이런 복고적 단어들이 섬광같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신비로운 사랑”이다. 심윤경 장편소설 『이현의 연애』는 이 사랑이 신비로운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런 모험도 있다. 살구즙 향기를 품어내는 이진은 영혼을 기록하는 이다. 점쟁이나 무속인이 아니다. 그들이 만나는 영혼은 죽은 자들의 것이지 않은가. 살아 있는 이의 영혼이 되어 그의 삶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그러고는 그가 살아온 사람을 기록한다. 그러다 보니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왔다. 출생도 신비롭다.

어린 이현을 사로잡은 어머니도 영혼을 기록하는 이었는데, 그녀의 뇌파가 멈춘 지 24시간 만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탄광을 소유한 왕족의 핏줄이다. 천하의 미색을 얻은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으나 어느 날 절필하고 은둔한다. 그는 지금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인들을 저주하며.

이현은 이진과 결혼하기로 한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인인데도 살아 보기로 한다. 이진은 현실생활을 정상적으로 꾸려 나갈 깜냥이 없는 여인이다. 살구즙 향기는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현이 누구던가. 한 여인과 오랫동안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혼 경력이 몇 차례나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제안했다. 계약결혼하기로. 3년 동안 같이 살고 헤어지는데, 그때 충분한 물질적 보상을 하기로 말이다. 이진도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사랑해서가 아니다. 영혼을 기록하는 일을 지속하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이라 여겨서다. 그녀를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인) 사람으로보다는 (운명이 부과한 일만 해야 하는) 기계로 보아야 맞을 성싶다.

이런 파국도 있다. 이현이 이진을 진짜 사랑하게 되었다. 부총리한테 정치권 진출을 돕겠다는 약조를 받았다. 그런데 그의 영혼을 이진이 기록하고 있었다. 보아서는 안 되는 그 기록을 보며 이현은 경악한다. 부총리가 “혐오스러운 미치광이 변태 성욕자”로 기록되어 있어서다. 이진을 힐난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사랑한다면 부총리에 대해 귀띔해주었어야 한다고, 자신은 이진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나 이진은 이현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마음이 없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영혼을 기록하는 이일 뿐이다. 기록된 부분을 찢어버렸다. 이진이 죽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운명도 있다. 일이 벌어진 날, 빈혈로 쓰러진 줄 알았던 이진이 임신중독증으로 죽었고, 딸을 낳았다. 그는 오래전 불임수술을 했다. “아이를 잉태시킨 것이 나의 정액이 아니라 나의 배신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장인이 앓던 병이었다. 이현은 매트릭스에 갇혀 버렸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육욕으로 사랑하고, 그녀의 일을 방해한 자가 반드시 겪는 형벌이다. 이 매트릭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까. 심윤경은 분명 소설가의 운명을 그렸고, 그들이 맞이할 사랑의 파국을 노래했을 터다. 빙의하여 그 삶을 언어화하는 이가 소설가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래서 희망의 물꼬를 터 놓았을 터다. 이현이 장인과 같은 삶을 살지는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이현의 연애』를 읽은 나는, 더 이상 함부로, 신비로운 사랑을 꿈꾸지 못할 듯싶다.


이권우씨는 책에서 스승을 만난 도서평론가로 서평전문잡지인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냈고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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