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붉은 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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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붉은 꽃’-장옥관(1955~ )

거짓말 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이 있다. 난생 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하는 여학생도 있다.

비언어적 누설이다.

겹겹 밀봉해도 새어나오는 김치냄새처럼 도무지 잠글 수 없는 것, 몸이 흘리는 말이다.

누이가 쑤셔 박은 농짝 뒤 어둠, 이사할 때 무명천에 핀 검붉은 꽃,

몽정한 아들 팬티를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등

개꼬리는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핏물 노을 밭에서 흔들리는 수크령,

대지가 흘리는 비언어적 누설이다.


몸에 신열이 날 것 같다. 아아 붉은 꽃이 필 것 같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그렇다고 벼락처럼 몸을 태워버리는 시가 아니라 몸속에서 몇 번이고 먼 창공의 천둥이 연이어 은은하게 울리는 그런 시다. 서두의, 거짓말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과 난생 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을 하는 여학생의 결합부터가 그렇다. 거짓말과 천진스러움을 단 한 번에 낚아채다니 과연 시인은 일상에서 낚시질을 하는 자로구나. 세계의 비밀은 언제나 일상 속에 있다. 그러니 몽정한 아들의 팬티를 빠는 어머니의 손등 같은 일상과 농짝 뒤 어둠 속에 쑤셔박힌 누이의 무명천에 핀 노을, 그 붉은 장엄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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