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생활사이>安東교구 정호경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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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천주교 성직자는 비교적 자유롭게 「직업」을 택할 수 있다.교구 본당에서 사목을 하거나 노동현장에서 일하거나 혹은 농촌에서농사를 하거나 어디든 사람이 있는 곳은 그의 일터가 될 수 있다.그런 점에서 특별히 어떤 직업을 택했다고 해 서 화제가 될것은 없다.
정호경(鄭鎬庚)신부,그는 안동교구 소속이다.80년대 들어 그는 10년 가까이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를 지냈다.79년 안동교구 사목국장을 할 때 「오원춘사건」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고 이로 인해 구속되기도 했다.그런 탓에 한국농민운동 사에 있어 그의 이름은 꽤나 여러 장(章)에 기록될 게 분명하다.
환갑을 내일모레 앞둔 鄭신부가 지난해부터 경북 봉화군 비나리마을에 정착했다.2천여평의 농지를 구입해 순전히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시작했다.처음 그가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이웃농민들은「그저 신부가 휴양차 왔겠지」하며 곱지않은 눈으 로 지켜봤다.
그런데 아침저녁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밭의 돌을 주워내고 논에 물대는 것을 보자 「정말 농사지으러 왔구나」하며 다시 놀랐다.
농사 첫 해 그의 수확은 생각보다 좋았다.논에서 한 해 먹고살 만큼 벼가 나왔고 밭에서는 고추를 풍성하게 거둬들였다.일절농약을 쓰지 않고 퇴비와 미생물만으로 지력(地力)을 높여 이같은 수확을 얻었다.
그가 농사짓기를 결심한 것은 오래 전부터다.가농 지도신부를 그만두고 함창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서는 돼지를 키웠고 93년 문경성당으로 옮겨서는 주일미사 이외에는 전국을 돌며 유기농법에관한 공부를 했다.바로 이같은 준비가 그의 「성 공」을 안겨다준 셈이다.
그러나 이런 영농기술 이외에도 그에게는 남다른 비결이 있었다.다름 아닌 땅을 사목(司牧)한다는 자세다.사제들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과 보살핌만큼 그는 땅과 그것이 키우는 농작물에 사랑을 기울였다.지난해 가뭄으로 논바닥이 타 들어갈 때 그는 밤을 새며 그들과 고난을 함께 나눴다.
鄭신부가 농사꾼이 된 것은 그리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대개의 사제가 그러하듯 그 자신도 「말」(강론이나 덕담)로써 4반세기를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살아왔다.
그는 쏟아놓은 말이 얼마나 책임있는 것인가에 수없는 밤을 고민해 왔다.남은 세월,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의 삶을 마감하고 싶었다.하루 두 끼 소식(小食)하는 그의 생활에서 돈이란 별의미가 없다.그래서 그는 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교구에서 나오는 생활비를 거절했다.
불교의 선종에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화두가 있듯이 그는 철저하게 이를 생활속에 도입하고 있다.그를 찾아오는 종교인이나 친구는 어김없이 그의 「농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밥값은 하고 가라는 것이 그의 명령이다.어쩌면 이런 그의 삶이 곧차원높은 사목이 아닌가 싶다.강단에서 변화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그러나 그의 농장에서 일하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마련이다.그는 평소 이렇게 말해 왔다. 『노동은 생명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바른 길이다.설령 인류가 병들었다 해도 그 병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땀 흘려 노동하는 것 뿐이다.』 농부가 된 사제 .그는 예수의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 (요한15 :1)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있음이 분명하다 .
崔濚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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