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처럼 클래식을 속삭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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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24면

글로만 읽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고 몇 번 실망한 적 있다. “글과 사람이 꼭 일치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어느 소설가는 나를 위로했지만, 글에서 풍기던 체취를 육화된 필자에게서 찾고 싶은 마음은 본능과도 같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글과 인간이 다른 세계의 원리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예컨대 스크린 속 배우와 사회인으로서 그 사람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다층적인 세계에서, 개인은 한 가지 역할만 하지 않는다. 조각나 있는 퍼즐을 맞출 자유는 타인에게 있다.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 방송인 유정아씨는 다양한 퍼즐을 지닌 사람이다.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 방송을 하며 단아하고 절제된 진행을 보였다. 그 공력으로 현재 서울대에서 ‘말하기’ 강의를 맡고 있다. 말 잘하는 것과 글 잘 쓰는 게 함께 가기 어려운 법인데, 이번에 내놓은 클래식 에세이 『마주침』은 유려하고 정갈한 문체가 두드러진다. 실제 만났을 때, 그녀라는 퍼즐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클래식을 소수의 예술이라고 생각해 멀게 느끼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인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악은 듣는 이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 음악에 말 걸기를 함으로써,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첼로의 음색이라고 표현되는 나직한 음성으로 유씨가 말했다. 단아한 옷차림에 또렷한 어조가 아나운서로서의 지나온 이력을 짐작하게 했다. 1997년 KBS를 퇴사한 유씨는 2005년 10월, 10년 만에 KBS FM 클래식 방송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현장에 돌아온 설렘을 담아 매일 한 꼭지씩 원고를 썼다. 그렇게 쟁여놓은 노트를 불려 펴낸 것이 이번 에세이다. “클래식 평론가는 아니지만 대중의 눈높이로 음악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은 제법 묵직하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계승과 혁신, 희망과 절망, 비범과 평범, 사랑과 우정, 혹은 이별 등 6부로 이뤄진 구성도 유씨가 직접 했다. “말보다 글로 평가받고 싶다”는 자신감이 배어난다. 그래선지, 에세이를 읽다 보면 음악 이야기로 풀어낸 유씨 자신의 고민이 짙게 다가온다.

예컨대 두 음악가가 있다. 한 사람은 20세기 옛 소련의 첼리스트다.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보낸 그는, 그 이유로 조국에서 추방당했다. 20년 가까이 국외를 떠돌았지만 자신의 생을 통틀어 가장 잘한 일이 ‘그 편지를 보낸 일’이라고 회고했다. 지난해 타계한 로스트로포비치 얘기다.

또 다른 사람은 나치 치하 독일의 지휘자다. 괴벨스의 문화원로원 의원, 제국음악국 부의장을 지내면서 폭격 속에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오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예술은 모든 우연한 정치적 사건 너머에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푸르트벵글러다.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며 유씨는 적었다. “예술은 정치를 초월하는 것인가. 예술은 정치를 초월해야 하는 것인가. 시대에 완벽하게 충실한 것이 결국 시대를 넘어서는 방편은 아닌가.”(81쪽)

음악은 신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생 안에 있다. 아름다움과 올바름이 늘 함께 가는 것도 아니다. 고운 선율이 흐르는 스튜디오 안에서 유씨는 많은 상념에 잠겼었나 보다. 고민 끝에 그녀는 적는다.

“모든 음악은 좋아하는 이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음악은 잠재적으로 우리 모두의 것이다. (중략) 내가 그를 좋아해 그를 갖지만 다른 이를 좋아해도 뭐라지 않는 자유의 몸, 이 어찌 즐거운 소유가 아니겠는가.”(92~93쪽)

언제나 음악이 듣기 좋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일로서 음악을 대해야 했을 땐 말이다. “두 아이를 낳으면서도 방송을 쉬지 않았어요. 임신 상태에서도 점심·저녁 시간에 진행을 했죠. 그땐 그런 내가 원망스러웠던지, 누군가 ‘10년 후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을 물어봤을 때, 저도 모르게 ‘양들은 편안히 풀을 뜯고’(바흐)를 대답했어요. 그때 제 마음이 그런 평온을 너무도 갈구하고 있었나 봐요.”

음악을 만난 것을 ‘생의 다행’이라고 말하는 유씨는 음악을 통한 몰입의 순간을 공감하길 원한다. 책은 그 공감에의 초대다. 인간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인간이기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지상의 삶.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1악장으로 시작해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으로 끝나는 아홉 개의 애청곡을 담은 CD를 초판 한정본에 한해 증정한다.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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