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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야기 ② 로마 벼룩시장의 칸타타

중앙일보

입력

이방인이 만국인으로 태어나는 벼룩시장

워크홀릭의 이탈리아 여행이 다소 지체될 듯하다. “이탈리아의 삶, 골목길에 있어요!”에서 만난 작곡가이자 이탈리아 여행가 권오경 씨의 이야기를 필두로, 친퀘 떼레까지 살펴보고 나니 그렇게 성급히 빠져나올 곳이 아닌 것만 같다. 그래서 다시 권오경 씨를 붙들고 늘어지기로 했다. 그 첫 이야기는 로마의 벼룩시장 여행기. 요즘 들어 부쩍 초상권에 민감해진 이탈리아 상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노하우를 배워보자.

새벽 5시에 마법이 일어나는 광장
로마 최대의 벼룩시장은 ‘뽀르따 뽀르떼제’ 광장에서 열린다. 규모가 크고 역사도 오래 돼서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관광객들에겐 그리 낯선 시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곳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새벽 서너 시에 움직여서 적어도 5시까지는 광장에 나가야 한다. 오후 한 두시가 되면 파장 분위기가 조성되다가 일시에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뽀르따 뽀르떼제 광장’의 길이는 약 3km정도 되는데 걷기에 자신 있다면 숙소에서 살살 걸어 나와 시장까지 산책을 즐기는 것도 좋다. 로마 시내의 숙소라면, 출발지에서 시장까지의 거리가 10km 내외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벨리광장으로 이동하는 구간에 테레베 강이 있어서 차를 타고 무심코 지나치기엔 그 풍경들이 너무 아깝다. 새벽에 일어날 용기가 없다면 가는 길은 버스를 이용하고 오는 길에 걸어 나오는 것도 좋은 방법. 관광객들은 대부분 파장 즈음에 시장에 들러서 그 엉성한 분위기가 로마 벼룩시장의 전부라고 믿기 일쑤다. 그렇다 보니, 시장 탐험을 제대로 하는 여행자는 손에 꼽힌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방문객들은 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광장에 도착해서 상인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천막을 치는 모습부터 감상한다. 아무것도 없었던 광장이 순식간에 북적북적한 벼룩시장으로 돌변하는 순간은 언제 봐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음표 하나 없던 오선지 위로 갑자기 마법 같은 오케스트라가 펼쳐지는 기분이라나.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에서 골목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로마의 벼룩시장은 신선한 소재가 되는 모양이다. 권오경(32)씨 역시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로운 장면과 신선한 느낌들이 펼쳐지는 이곳에서 창작의욕을 불태웠다고 한다. 꽃시장에 가면 왈츠풍 악상이 떠오르고, 호수 산책로를 걸을 때면 세레나데 한 소절이 흘러나온다. 이 감성 풍부한 작곡가를 뭣보다 가장 크게 매료시키는 것은 아니나 다를까 벼룩시장에 촘촘히 늘어선 골목길 풍경이었다. 수많은 골목들이 가지각색의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유혹했다.
골목 어귀를 돌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분위기들. 로마 벼룩시장의 골목들은 나무처럼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뻗어 나가는 형상이라 뚜벅이들에겐 최고의 놀이터다. 옷이 잔뜩 걸린 골목을 걷다가 다음 골목으로 들어가면 골동품이 수두룩하고 또 시선을 돌려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면 미술관에 온 듯 수많은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권오경은 골목마다 뿜어나는 분위기를 한데 묶어 꽤 괜찮은 창작곡을 만들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평소에 알고 있던 명곡들이 먼저 튀어나온다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권 씨가 추천하는 ‘벼룩시장에 어울리는 최고의 명곡’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제곡인 ‘La Vita E Bella’. 서민들의 잔잔한 애환과 특유의 명랑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곡이란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해낸 여행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골목 사이를 마음껏 걷다 보면 ‘혹시 명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회화 작품이나 조각품, 골동품 등을 만날 수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고흐의 진품을 건져 해외토픽이 된 사례도 있다. 그 밖의 물건은 현지인의 생계와 관련된 물품들이 대부분인데 간혹 심하다 싶을 정도로 허름한 물건도 보인다. 극빈층에 해당하는 상인들은 ‘이런 걸 정말로 팔려고 나왔나’ 싶을 정도로 쓰레기에 가까운 헌옷을 파는데 가끔은 장물도 취급한다.
여행 중에 도난당한 자신의 카메라를 시장에서 다시 샀다는 어느 여행가의 일화가 전해질 정도니 벼룩시장처럼 무방비로 트인 공간에서는 여행자 스스로 주머니 단속을 잘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초보 여행자들은 골동품 골목에서 넋 잃고 구경하다가 종종 도난 사고를 당한다. 도난 사고는 불쾌하기 짝이 없겠지만 그만큼 골동품 시장에 볼거리가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완성도 높은 작품들 외에도 손때 묻은 소품이나 우표 모음집 음반 등등의 소재들은 꽤 매력적이다. 고가의 타자기를 파는 상인들도 있는데 그들은 대개 카메라 촬영을 거부한다. 이런 상황에서 몰래 촬영했다가는 타지에서 곤혹을 치를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더 자유로운 여행을 위한 사진촬영
비싼 비행기 타고 이탈리아까지 날아갔는데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없다니, 그것 참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다. 하지만 권오경은, 진정한 도보여행가라면 그런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여행 하는 사람들은 사진촬영을 늘 우선시 하는데 그것에 중점을 두다 보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촬영해야 한다는 부담과 피사체의 동정을 살피는데 드는 에너지 등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벼룩시장을 나갈 때면 카메라 대신 핸드폰 카메라를 사용한다. 거창한 장비를 들이대면 허름한 좌판은 물론이고 특히 수공예품 상인들이 크게 거부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싫다는데도 막무가내로 촬영하면 잡음이 일어난다. 그러니, 어떻게든 사진을 남기고 싶은데 즐거운 여행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싶다면 몇 가지 노하우를 익혀두시라. 뭣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 말을 몇 마디 정도 외워두는 것이다. 고급 상점의 직원들은 어느 정도 생활 영어를 구사하지만 벼룩시장의 서민들은 영어가 익숙하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짧은 인사말이라도 그들의 언어로 전하면 아무래도 마음이 쉽게 열린다. 그리고 빈손으로 다니는 것 보다는 몇 가지 물건들을 손에 들고 시장 보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좋다. 더 나아가 그들이 먹는 간식거리를 함께 먹으며 맛있다는 찬사를 아낌없이 표현한다면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나와 내 가족들이 먹고 사는 것을 이방인이 함께 즐겨준다면 당연히 기쁘지 않겠는가.

벼룩시장 여행의 묘미
벼룩시장은 그 나라 서민들의 삶이 가장 잘 응축된 장소다. 그러니 왕가의 궁궐이나 호화 미술관을 주의 깊게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 내부의 분위기를 충분히 만끽할 줄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시장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벼룩시장은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은 배낭 여행자에게 활용도가 높은 공간이다. 아이스크림이며 빵 등의 간식을 실컷 먹을 수 있고 부피가 큰 외투를 따로 챙겨 다닐 필요 없이 벼룩시장에서 대충 사 입고 귀국할 때 버리면 아주 실용적이다. 너덜너덜해져서 더 입을 수도 없게 생긴 외투를 들고 나와 파는 상인들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우리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며칠 정도 걸칠 요량으로 구입한다면 매우 경제적이다. 이렇게 열린 사고로, 낡은 미로 속으로 뛰어 들어가 싱그러운 느낌을 발굴하는 것. 그게 바로 벼룩시장 탐험의 묘미다. 하지만 무턱대고 헤매는 행위는 쓸데없는 피로와 사고를 부르므로 되도록 삼가자.
시장여행을 하기 전에, 교통과 도보 관련 정보 그리고 시장 내에서 어떤 아이템을 중점적으로 즐길 것인지 대충 구상해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덧붙여 시장 근처의 마을과 산책로 정보도 미리 조사해서 간다면 헤매는 일 없이 마음껏 유영할 수 있잖겠는가. 다른 시장과 구분되는 로마 벼룩시장만의 독특한 정보도 체크하는 것 잊지 마시라. 로마의 벼룩시장은 요일별로 새로운 작물과 이벤트 세일이 있다. 관광 시즌에는 꽤 고급스러운 소재의 구두들을 우리 돈 만원 내외로 판매하는데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패션의 도시인만큼 싸구려 청바지 무더기 속에서도 훌륭한 디자인을 많이 발견할 수 있으니 이에 관심이 있다면 유럽의 규격 사이즈를 미리 공부해두는 것이 좋다. 지혜로운 쇼핑 방법을 숙지하고 시장 상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노하우를 익힌다면,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광장 주변 산책로를 유유히 돌아볼 여유만 있다면 환상적인 로마의 휴일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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