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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33<김일성명령서>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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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북한 최고지도부내의 6.25전쟁 결정과정에서 일부의 반대가 있었다는 주장은 6.25전사(戰史)를 기록하는데 매우 중요한 발굴이다.최근 필자가 입수한 전쟁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문서중『김일성명령서』『인민군명령서』와 美극동군사령부가 작성한 자료 등에 따르면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남한의 국방장관에 해당)인 최용건(崔庸健)이 전쟁에 반대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용건은 김일성(金日成)의 가장 가까운 전우로서 사실 김일성을 국가수반으로 만드는데 명실공히 일등공신이었고 전쟁 직전 軍최고책임자인 민족보위상의 위치에서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은 선뜻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게다가 망명한 前북한 간부나 軍인사들의 증언에서 최용건의 전쟁반대에 대한 얘기가 있었으나 자료로입증되지는 않았다.
최용건이 전쟁에 반대했었다는 방증자료로는 먼저 50년 전쟁이결정된 뒤 최용건의 이름이 5월 이후 전체 사단급에 내려가는 민족보위성의 중요한 전쟁관련 전투명령서에서 빠져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그가 명령권자가 아니라는 증거다.거의 대부분의 중요 명령을 원래의 명령권자인 민족보위상이자 인민군총사령관인 최용건이 아니라 민족보위성 부상(副相)이자 인민군 포병부사령관인 무정(武丁)이 내리고 있다.
또 인민군내 최고수준의 명령서에는 엄격한 비밀유지를 위해 반드시 발송대상이 포함되는데 이 중요한 명령들의 발송대상에 소련인 고문이나 총고문은 포함돼 있으나 민족보위상은 빠져있는 경우가 많았다.이러한 현상은 극히 예외적 경우다.다른 나라 전쟁의경우를 상상해 볼때 전쟁을 앞두고 국방장관에게는 보고되지 않고외국 고문단에는 보고되는 군사명령체계란 있을 수 없다.
최용건의 중요한 명령은 50년4월28일 5.1절을 기념하는 명령 이후 전쟁 발발때까지 거의 없다.5월 『민족보위성 총참모부 명령 제0366호』를 발하나 그것은 비전투적 명령이었다.최용건은 전쟁 직전인 6월23일 민족보위상의 자격으 로 사단장들을 통해 전선의 인민군들에게 훈화를 내려 보냈다.이후 전쟁발발후인 7월5일까지 그의 명령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최용건의 명령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모두 훈련과 배치.징병에 관한 것이지 직접적인 전투명령은 없다.7월5일 그는 『50년도 단기전투정치훈련에 관하여』라는 명령을 발했다.명령권자는 최용건과 총참모장 강건(姜健)이다 .그러나 내용은 7월7일부터 21일까지의 훈련에 관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것에 불과했다.
美극동군사령부본부가 52년 작성한 『조선인민군사』에는 최용건의 전쟁반대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최용건은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범위내에서 대남침략을 반대했다.그는 남침을 준비하기 위해 온 소련의 새로운 군사고문단에 대해서도 반대했다.그는 이전 고문관들과의 관계는 좋았었다.그러나 바실리예프고문단장을 비롯한 새로운 고문단과 의 관계는냉랭했다.최용건은 전쟁을 위한 전투훈련과 장비확충을 꾸물거렸다.이에 바실리예프는 그를 배제하고 직접 전쟁을 준비했다.최용건은 이 준비에 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그는 군사위원회 위원이됐으나 작전지시에서는 아무런 능동적 역할을 하지 못했고 스스로군대의 배치문제를 다루는데만 만족했다.」 이 자료는 미군 자신들의 정보뿐만 아니라 북한군 내의 명령들과 그 안에 있는 정보원들의 보고,그리고 포로들의 진술을 종합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뢰할만하다.
물론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최용건이 민족보위상 직을 그대로 유지했고,6월26일 조직된 7인군사위원회 군사위원으로 임명됐기때문에 그가 전쟁에 반대했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쟁을 총지휘할 전선사령관을 김책(金策),총참모장을 강건이 각각 맡았다.전선사령관을 김책이 맡는 것도 가능하지만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맡는 것보다는 부자연스럽다.또 그가 전쟁직후 「국내외 일체의 주권을 장악한」전시 최고 주 권기관인 군사위원회에 포함됐지만 미군정보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즉 그가 군사위원회에 포함된 것은 민족보위상으로서 당연직이었던 것이다.전쟁이 나자 사실상 민족보위성은 거의 기능마비,또는정지상태였다.7월4일 김일성이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비슷한 시기에 전선사령부가 생기자 최용건이 데리고 있던 총참모부의 참모나 민족보위성 간부들은 전부 전선사령부의 참모나 간부로 이동했다.그는 지휘할 부하가 없는 사실상의 「나홀로」장관으로 남았으며 모든 명령서를 분석해 보면 주요 명령과 지휘체계는 완전히최고사령관 김일성-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라인으로 내려가고 집행되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 점은 『인민군 명령서』를 통해 확인된다.50년 4월부터 10월까지 내려진 인민군 명령서와 보고서들에서 민족보위상의 중요 명령은 찾기 어렵다.민족보위상에올라간 보고서들도 있으나 다른 명령계통에 비해 많지 않다.그는 민족보위상으로 서 전쟁의 중심 인물이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최용건이 인민군의중요한 명령서들에 다시 나타나고 군내의 중요 직위를 맡은 것은50년9월이다.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은 방어총사령부를 만드는데 이때 뜻밖에 최용건이 방어총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그러나 이 직책도 민족보위상 겸 총사령관인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책이다.오히려 그가 이미 총사령관의 직위에서 물러났음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온건파 흐름 제압 6.25개전을 결정하는데 북한최고지도부 수준에서조차 완벽하게 합의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북한권력층내부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북한지도층 내에김두봉(金枓奉).홍명희(洪命憙)등이 최소한 전쟁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 은 이미 알려져 있다.이것은 전쟁결정이 반대파,또는 온건파의 한 흐름을 제압하고 강경파의 주도아래 강행된 것을 의미한다.특히 북한 최고지도부는 軍최고책임자가 반대하는 전쟁을 강행했던 것이다.김일성의 최측근이자 군사지도자의 동의조차 얻지못한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일 수는 없는 것이며 「인민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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