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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을 아시아의 쿠바 아닌 스위스로 만들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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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04면

마잉주 국민당 후보가 22일 투표 직후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손을 흔들고 있다. [타이베이 AFP=연합뉴스]

“대만 국민이 바라는 것은 경제번영과 정치안정, 그리고 화합이었다. 대만 국민의 희망을 정책으로 바꿔 실현 시키겠다.”

대만 새 총통으로 뽑힌 마잉주

2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압승한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후보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관계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제2의 경제도약을 다짐했다. 그는 투표 전날 “대만을
‘아시아의 쿠바’가 아니라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가 펼친 ‘중화(中華)경제권’의 청사진은 무엇일까. 우선 중국 대륙과는 유럽연합(EU)을 모델로 해 ‘양안 공동시장’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양안 간에 종합적인 경제협정을 맺은 뒤 경제·무역·투자 장벽을 단계적으로 철폐할 전망이다. 중국은 몇 년 전부터 홍콩·마카오에 이런 모델을 적용해 왔다. 대만이 가세하면 싱가포르까지 아우르는 자유무역지대를 출범시킬 수 있다. 대만은 그동안 대기업과 국가 전략산업의 대륙 진출을 제한해 왔다. 마 총통 당선자는 조만간 양안 직항로를 개통하고 대륙의 자본과 관광객을 유치하겠다고 공약했다.

마 당선자는 ‘대만 독립론’ 포기도 선언했다. 이른바 신(新) 3불(不)정책이다. 그는 올 1월 양안관계에 대해 “통일하지 않고(不統), 독립하지 않고(不獨), 무력을 쓰지 않겠다(不武)”고 밝혔다. 국민당 정권이 과거 집권할 때 내건 ‘3불정책’(불접촉·불담판·불간섭)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천수이볜 총통과 민진당은 집권 8년간 “대만과 중국은 별개의 독립 주권국가”라며 중국의 심기를 건드려왔다. 그 때문에 대만해협엔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감이 흘렀다.

마 후보는 어떤 경제 회생책을 갖고 있을까. ‘6·3·3 공약’이다. 연간 성장률 6%, 1인당 소득 3만 달러(2016년까지), 실업률 3% 이하(2012년까지)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내놓은 경제대책은 이명박 대통령의 ‘7·4·7 공약(성장률 7%, 1인당 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과 흡사하다. 그래서 마 당선자를 ‘대만의 이명박’으로 일컫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2015년까지 정부가 2조6500억 대만달러(약 87조원), 민간이 1조3400억 대만달러(약 44조원)를 투입해 12대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경제난에 대한 대만인의 불만은 폭발 일보 직전이다. “천수이볜이 집권한 뒤 대만 경제가 한국에 뒤졌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 덕택에 마 당선자는 중국의 티베트 시위 유혈 진압과 자신의 미국 영주권 문제, 공금 유용 의혹 등 각종 네거티브 공세를 뚫고 압승을 거두었다. 2004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은 민진당에 2만9518표(0.02%) 차이로 석패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선 민진당 정권의 양안 대치 전략, 부패와 무능, 천 총통의 무절제한 발언에 지친 중도 세력은 국민당 지지로 돌아섰다. 국민당은 대만 경제가 과거 8년간 연 4.1%밖에 성장하지 못해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꼴찌를 면치 못했다고 공격해 왔다. 마 당선자의 ‘무능 정권 심판론’은 올 1월 총선에서도 위력을 발휘해 국민당은 입법원 의석(총 113석) 중 81석을 휩쓸었다.

마 당선자는 중국 못지않게 미국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쓸 전망이다. 미국통인 그는 장징궈(蔣經國) 총통 시절 영어 통역을 할 만큼 미국 사정에 밝다. 그는 천수이볜 총통과 달리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최고 명문인 젠궈(建國)고교와 대만국립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4년 중산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떠나 뉴욕대에서 석사 학위,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81년 귀국 직후 총통부 제1국 부국장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한국으로 따지면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마 당선자는 쑹추위(宋楚瑜) 친민당 주석과 함께 장징궈 총통의 비서로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롄잔(連戰) 행정원장 시절엔 43세에 법무부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국민당 정권의 부패가 심했지만 그는 깨끗하고 소신 있는 자세로 부패 척결에 나서 ‘미스터 클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롄잔 내각이 퇴진하자 그는 국립정치대학 교수로 돌아가 재기를 노렸다. 1m81㎝의 꽃미남인 마 당선자의 강의에는 수백 명의 여학생이 몰려들어 화제를 낳았다.

그가 정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한 계기는 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였다. 마 당선자는 재선을 노리던 천수이볜 당시 시장을 5%포인트 차이로 꺾었다. 2004년 총통 선거 당시 당 일각에선 “마 시장이 출마해 천 총통을 상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됐다. 하지만 마 당선자는 롄잔 주석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그러나 마 당선자의 앞에 탄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최근 티베트 유혈 사태에 대해 “대만이 베이징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으로 중국 측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특히 양안 경제교류가 늘어날 경우 대기업들이 빠져나가는 대신 중국의 값싼 인력과 농산물이 유입될 수 있다. 일자리 창출과 민생 경제를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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