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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과주말을] 돈의 노예가 된 비운의 대문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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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지음,
예담,
344쪽, 1만3000원

창백한 안색, 움푹 팬 볼, 높은 광대뼈,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한 이 남자. ‘잔인한 천재’, ‘영혼의 선견자’ 같은 거창한 수식어로 알려진 이 남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81). 심각해 보이는 작가의 인상 탓인지, 1000페이지는 족히 넘어가는 두께에 담긴 깊이 때문인지, 서가에 꽂힌 그의 책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한데 인류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대문호가 평생 집착했던 대상이 다름 아닌 돈이라면?

러시아 문학박사이자 고려대 교수인 저자는 대문호의 심오한 정신세계 분석은 이번엔 살짝 비껴가는 대신 작품 행간에 배어있는 ‘돈냄새’에 후각을 곧추 세웠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7편을 그의 실제 인생과 비교해가며 ‘돈’을 중심으로 풀어낸 이 책에는 저자가 30여년간 쌓아온 러시아 문학에 대한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도스토옙스키는 일생동안 쪼들리며 살았다. 남에게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치욕 때문이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비롯한 세기의 명작들은 이미 원고료를 당겨 쓴 그가 쫓기듯 써낸 작품이었다. 이렇듯 돈은 그의 인생의 구심점이 됐고 자연히 소설의 가장 중요한 테마도 돈이 됐다.

어느 날 도스토옙스키는 부유한 친척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는다. 막대한 유산의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친척의 유언도 함께 전해진다. 변호사는 만약 무효소송을 낼 경우 유산을 그의 몫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하고 도스토옙스키는 무효소송을 낼 의향이 있다는 답을 보낸다. 도박에 빠진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친척은 죽지 않았다. 변호사와 짜고 그를 떠본 것이다.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유산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갑자기 죽은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같은 경험은 소름끼칠 만큼 적나라한 묘사력을 자랑하는 장편소설 『도박꾼』의 모티브가 됐다고 석 교수는 말한다.

책은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고고한 명언을 남긴 동시에 ‘돈은 주조된 자유다’같은 속물적인 명제를 금과옥조처럼 여긴 보통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유머러스한 구어체로 써내려간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 무슨 ‘스키’로 끝나는 등장인물들의 긴 이름에 질려, 혹은 그의 얼굴이 풍기는 진지함에 겁먹고 그의 작품을 멀리했던 이들도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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