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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소프트파워

나의 가장 강한 라이벌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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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 함께 서명한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1785년에는 애덤스가 주영대사로, 제퍼슨은 주불대사로 나란히 나갔다. 대선에서도 맞붙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당선됐다. 게다가 두 사람은 거의 한날한시에 죽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지 50년이 된 1826년 7월 4일 정오 무렵 애덤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다”고. 하지만 정작 제퍼슨은 그보다 30분 전에 이미 세상을 떴다. 처절하다 못해 웃음마저 자아내는 라이벌의 삽화다.

#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기원전 183년 카르타고 원로원의 밀고로 로마군에게 위치가 노출되자 독배를 들이켜 자살했다. 그 후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 호적수이자 라이벌이었던 로마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세상을 떴다. 참 묘한 일이다.

# ‘박치기왕’ 김일과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은 1960년대 국내 프로레슬링계를 양분했던 라이벌이다. 하지만 65년 11월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라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원수처럼 갈라섰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2006년 2월 병든 김일은 역시 투병 중이던 장영철을 김해의 한 병원으로 찾아가 화해했다. 같은 해 8월 장영철이 죽자, 김일도 그해 10월에 세상을 떴다. 라이벌이 죽으면 남은 상대도 따라가는 것이 역사의 숨은 공식인가 보다.

# ‘YS 없는 DJ’, ‘DJ 없는 YS’를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 없다! 라이벌은 서로에게 껄끄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서로에게 없어서도 안 될 존재다. 둘 중 한 사람이 없다면 상대도 존립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가 라이벌이다. 라이벌은 서로를 긴장시키고 서로를 키운다. 그만 없다면 두 다리 쭉 뻗으며 만사가 형통할 것 같아도 실상은 그 없이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관계가 라이벌이다. 왜냐고? 늘 눈엣가시 같은 라이벌이 있기에 한 번 더 조심하고, 두 번 더 따져보고, 세 번 더 긴장해 결국 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무너지고 스스로 엎어졌을지 모른다. 라이벌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 비킬라 아베베는 1960년 로마올림픽과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마라톤 2연패를 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마라톤에서 3연패에 도전했지만 도중에 레이스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재기를 꿈꾸며 훈련에 임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의 중증 장애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은 자신과 싸웠다. 그는 장애인 올림픽의 전신인 ‘스토크 맨더빌 게임스’에 다시 출전해 양궁과 탁구 부문에서 우승했다. 그의 가장 강한 라이벌은 다름 아닌 ‘포기하고 싶은 자기 자신’이었다.

# 피겨 요정 김연아가 어제 스웨덴에서 치러진 2008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진통제를 맞아가며 또 한번 투혼을 불살랐다. 하지만 전날의 부진을 만회하지 못해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우승은 동갑내기 라이벌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였다. 하지만 김연아는 참 아름답고 위대했다. 고관절 부상에 따른 통증과 주저앉고 싶은 내면의 유혹 속에서 ‘그만하면 됐다고 타협하는 나’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투덜대는 나’, 그 가장 강한 라이벌과 싸워 끝내 이겼으니 말이다. 결국 나의 가장 강한 라이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 라이벌을 이겨야 진짜 승리자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