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행복한책읽기>"오분후의 세계" 무라카미 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흔히 그렇게 오해되지만 의외로 작가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그는 대문자로 된 한마디의 문장을 말하기 위해 일생동안 펜을벼리는 사람이다.자신의 대문자를 찾아낸 작가,비로소 그것을 말할 줄 알게 된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을 쓰지 않 는다.자신이 표현한 대문자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되풀이하는 앵무새가 되거나,이미 더는 자신의 비서가 아닌 대문자를 기계처럼 복사하는 상태를 자존심의 화신인 작가 스스로가 수락할 리 없다.그는 생각한다.내가 그것만을 되풀이 말하기로 운명지워졌다면 소설나부랭이로보다 설교가로,혹은 행동가로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톨스토이와 미시마 유키오는 대문자를 발견한 자의 자긍심과 문학에서 낙오한 자의 욕망을 동시에 증거한다.
서바이벌 게임과 컴퓨터 게임의 지대한 영향을 받아 쓰여진 무라카미 류의 최근작 『오분 후의 세계』는 20년 가까운 작가 생활 끝에 무라카미 자신의 대문자를 공표한 소설이다.도쿄(東京)시민인 오다기리는 아침 조깅 중에 타임 슬립(T ime Slip)되어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로 월장한다.그 곳은 2차대전종전 무렵부터 전혀 다른 시간이 진행된 세계로 두 개의 원폭을맞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2천2백m의 깊이에 파 놓은 지하도시로 합참본부가 도피한 이후 오늘까지 열도를 점령한 미국.영국.소련.중국과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일본.
주인공은 귀환해 현실세계의 소시민이 되기보다 일본 해방의 전사가 되기를 선택하는데 바로 그 부분에,현재의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 없다고 늘 주장해 왔던 작가의 호소가 개입해 있다.비록 무력점령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식민지나 다름없다는 것이 무라카미의 일본의 미국 식민지론 요지다.76년 일본내 미군 기지촌을 묘사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등단한 이래 그는 미국화된 수도 도쿄를 파괴하는 『코인로커 베이비스』와일본은 강해져야 된다고 믿는 국수주 의자가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을 썼고,이번 작품에서는 정신적으로 서구화.혼혈화되어가는 일본내의 준국민과 비국민을 향해 『국민은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리는 곳에 있다』고 선언한다.
참국민은 소수의 전사로만 존재한다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다분히 신화 조작적인 그 구호야말로 보스니아.르완다.아제르바이잔.아일랜드와 같이 유혈분쟁이 끊이지 않는 땅에서 성공하고 있는죽음의 신이다.무라카미처럼 대문자를 발견한 작가 의 운명은 이제 무엇일까.
그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기껏 역사소설을 빌려 자신의 신념을 간증하지 않을까.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