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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江湖동양학] 사주의 고수들 "北에서 왔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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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종사업(迷信從事業)'.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직업 분류표에는 '미신종사업'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업종이 미신종사업자에 해당하는가? 직업적으로 사주팔자를 보아주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주쟁이'에 대한 공식적 명칭은 미신종사업자였던 것이다.

90년대 들어와서는 다시 '점술업(占術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점술업이라는 명칭보다 과거의 미신종사업이라는 이름이 훨씬 낭만적인 이름 같다. 이처럼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정신(正信)'이 아닌 '미신(迷信)'에 종사하면서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을 준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미신이 파고들어갈 빈틈은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세상은 빈틈도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 현대사에서 미신종사업자가 최초로 출현한 시기는 한국전쟁 때였고, 그 장소는 부산의 영도다리 밑이었다. 부산으로 피란 온 사람들이 영도다리 밑에서 사주를 보기 시작했다. 그 피란민을 대상으로 사주 영업을 시작한 사람들 역시 이북에서 피란온 사람들이었다. 명리학의 고수들은 해방 이전에는 이북에 몰려 있었던 탓이다. 명리학계의 동의보감이라 일컬어지는 '사주첩경'의 저자 이석영도 평안북도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북사람들이 사주에 몰두했는가?

조선시대에 이북은 차별을 받았다. 이남 출신에 비해 고급 관료의 배출 숫자도 훨씬 적었으므로 알게 모르게 소외감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가 이남보다는 상대적으로 이북 지역에서 환영을 받았던 배경에는 조선시대에 이북사람들이 받았던 소외감과 관련 있다. 누적된 차별과 소외감은 '주님 앞에 평등'이라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사주도 마찬가지다. 차별 받던 이북 사람들에게 사주의 이론은 매력적이었다. 사주라고 하는 것은 생년월시만 잘 타고나면 왕도 될 수 있고, 장상도 될 수 있다는 신념체계다. 반대로 아무리 지체 높은 집안의 자식이라 해도 사주가 좋지 않으면 별 볼일 없다고 믿는다. 사주가 좋으면 신분이 비천해도 기회가 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혁명사상이 들어 있고, 그것이 타고나면서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정론이자 운명론이 내포돼 있다. 모순돼 보이는 양면이 미묘하게 배합돼 있는 셈이다. 한쪽에는 치열한 현실타파의 노선이 마련돼 있고, 다른 한쪽에는 운명에의 순응이다.

혁명과 운명론의 배합. 이 두 가지 요소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그 사람들이란 바로 머리는 있는데 출세 길이 막혀 버린 사람들이다. 머리는 좋은데 구조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채널이 막혀버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명리학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머리는 좋은데 왜 세상에 나가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사회체제가 잘못돼서 그런 것이다.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홍경래 난을 비롯해 조선조 각종 반란사건에 감초처럼 명리학이 개입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다.

그 다음에는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는 내가 왜 이처럼 초라하게 살아야 하나. 왜 대접을 못 받고 사는가에 대한 해답이 운명론이다. 능력이 있는데 출세를 못하는가? 그 이유를 운명론이 아니면 해명할 수 없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가운데 매우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사상가라고 평가받는 '논형(論衡)'의 저자 왕충(王充:AD 27~97))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천재였지만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는데, 왕충은 그 이유가 자신의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운명이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고 여겼다. 사회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명제처럼, 사주 신봉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운명론 신봉자이지만 집단적인 차원에 진입하면 혁명론자로 전환된다. 이북 사람들, 특히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 지역 사람들이 일찍부터 명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배경에는 소외와 차별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한편 '사주첩경'의 저자 이석영은 1920년 평안북도 삭주군 삭주면 남평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명리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 이양보(李陽甫)로부터 훈도를 받았다. 48년 월남해 충북 청주를 거쳐 서울로 옮겨와 살다가 83년 사망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주를 연구하게 된 시기는 48년 월남한 후에 생계수단으로 삼으면서 부터다. 69년에 완성한 '사주첩경'6권은 48년부터 대략 20년간의 연구와 실전체험을 정리해 저술한 것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江湖東洋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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